한줄 詩

지금이 가장 좋다 - 손남숙

마루안 2021. 3. 7. 19:25

 

 

지금이 가장 좋다 - 손남숙


밤하늘이 한 발자국씩 이동하고 있다
겨울에서 봄이 오고 있다
아득하던 오리온 별자리가 환하게 눈에 들어온다
빛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가고
지구는 돌아가고
우리의 이별은 차고 이지러지는 달처럼 자연스럽다
삼월의 마늘밭은 아침이면 더 푸르게 목을 늘일 것이다
저 계절에서 이 계절로 넘어온 깊은 물결
나의 남루함이 새로운 남루함을 걸친다 해도
따스하게 반겨야 할 얼굴이 있다
매일 달이 조금씩 멀어지고 있듯이
어떤 계절에 걸쳐진 밝음은 어두운 숲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
어쩌면 너의 가장 아름다울 시절이 여기에
나는 지금이 좋다 착하고 명랑하게
매일 눈뜨는 아침이


*시집/ 새는 왜 내 입안에 집을 짓는 걸까/ 걷는사람

 

 

 

 

 

 

들판은 나의 것 - 손남숙


들판을 걸어갈 때면 주인이 누구든
논에 사는 생명과 흙과 물과 공기는 다 나의 것
꼬물거리는 지렁이와 뛰어오르는 개구리도 나의 것
깃털 구름과 팔랑거리는 나비와
짝을 쫓아가는 잠자리도 나의 것
오월의 어린 벼는 서늘한 바람이 어루만지고
백로는 새하얀 깃을 풍금처럼 연주하며 내려앉는 곳
부드럽게 부서지는 흙
괭이밥과 얼치기완두가 살랑거리고
질경이는 서슴없이 발에 밟히는 곳

논두렁길을 걷는 그 순간만큼은
흙과 공기와 바람결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이 나의 친구
나에게 말을 걸고 같이 웃고 걷는다
두 발은 어디든지 갈 수 있고
두 눈은 무엇이든 보고 듣는다
부드러운 풀의 노래
딱따구리가 쪼아서 구멍이 난 나무
향긋한 찔레꽃 언덕을 지나 산딸기를 입에 넣으며
도랑물에 젖은 고마리 꽃을 보는 곳
걷고 있는 동안 그 순간만큼은 누가 뭐라고 하든
들판은 나의 것

 

 


*시인의 말

놀라워라
그것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너는 아는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네
다만 잎사귀에 스민 애벌레의
조용한 마음이기는 했고
주름을 거느린 꽃의 진심이기도 했고
날개를 가진 생명들이 붕붕거리는 것이기도 하여
어둠 속의 흰 눈
소리가 나지 않는 꿈
그래서 그것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묻지 않고
계속 걷기만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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