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오후를 펼치는 태양의 책갈피 - 김희준

마루안 2021. 3. 8. 21:51

 

 

오후를 펼치는 태양의 책갈피 - 김희준


글을 모르는 당신에게서 편지가 왔다
흙이 핥아주는 방향으로 순한 우표가 붙어 있었다
숨소리가 행간을 바꾸어도
정갈한 여백은 맑아서 읽어낼 수 없었다
문장의 쉼표마다 소나기가 쏟아졌다

태양은 완연하게 여름의 것이었다
고향으로 가는 길에선 계절을 팔았다
설탕 친 옥수수와 사슴이 남긴 산딸기
오디를 바람의 개수대로 담았다
간혹 꾸덕하게 말린 구름을 팔기도 했다
속이 덜 찬 그늘이 늙은호박 곁에 제 몸을 누이면
나만 두고 가버린 당신이 생각났다

찐 옥수수 한 봉지 손에 들었다
입안으로 고이는 단 바람이 평상에 먼저 가 앉았다
늦여름이 혀로 눌어붙고
해바라기와 숨바꼭질을 하던 나는
당신 등에 기대 달콤한 낮잠을 꾸었다

해바라기는 태양을 보지 않고도 키가 자란다
기다리는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빈 종이에 스며든 그날의 체온이 기척 없이 접힌다
밀도 높은 당신이 하늘에서 쏟아진다


*시집/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문학동네

 

 

 

 

 


소년기의 끝 - 김희준


잊어버렸니 누나야 나는 혼자서 병적인 걸

도망친 고아원으로 끌려갔던 건 놀이터가 앞에 있었기 때문이야

어제의 구름을 기억하는 곳은 거기밖에 없어

과열된 발바닥에 우리는 새로운 이름을 새겼지

누나야 왜 우리를 카르마라 믿었는지 모르겠어

반동은 낮선 것일수록 발을 심하게 구르고

무릎으로 다가오는 밤이 가벼워서 나는 흡수되고 싶었어

그럼 새아버지는 왜 우리 아랫도리를 벗겨놓았을까

운명을 섞으면 근친이 되는 것인지 묻고 싶어

우리의 근원이 그날 밤이었다고 누나야

결핍된 목소리가 바람을 끌어와 등을 만진다면

카르마를 세게 밀어줄게

미끄럼틀 아래에 벗어둔 정오의 한쪽

띠를 반복하는 그네의 궤도를 이탈할 때까지

쌍성이 된 우리에게서 나는 오래도록 반성(伴星)으로 돌고 있어

 

 


# 김희준 시인은 1994년 경남 통영 출생으로 경상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을 다녔다. 2017년 <시인동네>를 통해 등단했다. 2020년 7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은 그의 첫 시집이자 유고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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