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회진 - 전영관

회진 - 전영관 그가 오면 아침이 새뜻해진다 막연하게 자신감 생기는 것이다 능숙한 의사같이 쭈그러진 어깨를 펴주고 무릎을 칼날로 세워준다 굴종의 자세로 늘어지는 삼겹살 환멸의 증거로 널브러진 토사물 타협의 지분으로 뒤섞인 찌개 냄새들을 벤젠이라는 항생제로 치료한다 새물내 나는 옷을 곧바로 입는 것보다 어제 입었던 셔츠가 편한 까닭은 나만 편들어주는 체온이 남아서겠지 눈치가 태도로 남아서겠지 환절기에는 병원마다 감기 환자로 줄을 선다 세탁소가 벗어놓은 옷으로 그득한 것은 삶의 자세를 바꾸면 아프다는 뜻이다 품은 맞는데 기장이 짧은 미흡처럼 일상은 무언가의 트집을 무릅쓰는 일이다 물러서는 파도를 따라 잔걸음질치다가 되돌아서는 일이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다 보낼 때 확인했는데 배달되면 주머니마다 손 넣어본다 누..

한줄 詩 2021.03.22

잃어버린 끈 - 김태형

잃어버린 끈 - 김태형 말 대신 가만히 손을 내밀던 할머니에게서 끈을 받아왔다 여러 개 가져와서 다 나눠 주고 하나만 남았다 어느 새 그것마저 어느 손목을 따라갔다 거듭 연결되어 그 끝이 없으니 매듭이란 성스러운 것이다 내가 나눠 준 끈은 지금쯤 남아 있을까 그게 영원이라고는 누구도 헤아리지 못해도 내 손목에서 풀려진 끈 하나 무엇엔가 이어져 있을 것이다 허공일지 모른다 저 어느 보이지 않는 암흑대 속의 별일지도 지구가 자전하는 동안 하나뿐인 심장도 북극성을 중심으로 기운다 내 손목에서나 회오리치다가 또 다른 손목으로 건너간 마지막 끈 이전도 이후도 그 사이도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으니 끊어져 잃어버린 끈이 되어서야 허공이 된다 그렇게 또 매듭이 이어지는 것일까 무수한 별들을 하나하나 지워 가던 눈길로 ..

한줄 詩 2021.03.17

목화가 피어 살고 싶다고 - 정현우

목화가 피어 살고 싶다고 - 정현우 시든 억새를 쥐고 당신에게 가는 길 눈구름에 입술을 그리면 어떤 슬픔이 내려앉을까 눈사람을 만들 때 당신의 눈빛이 무슨 색으로 변할까 은색의 숲이 심장이 뛰기 시작해 몸속에 목화들이 우거져 당신에게 가는 문병은 어디로 휘어질까 마른 목화솜을 쓸어 모으면 마음엔 서리지 않는 유리 입김, 단 한번 몸과 기쁨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살려주세요 빌 수밖에 없는 사람의 몸과 캐럴의 종이 울던 밤 솜 같은 당신을 안아보았지 한 사람을 지우기 전에 이 슬픔이 끝나기 전에 한 문장만 읽히고 있었어 사는 거 별거 있었냐 그냥, 목화가 피어 울고 싶다고 살고 싶다고 그래, 엄마, 잘 자 *시집/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 창비 용서 - 정현우 믿지도 않은 신에게 기도했다. 텅 빈 고해소에..

한줄 詩 2021.03.17

사내와 시계탑 - 전인식

사내와 시계탑 - 전인식 저물 무렵 역 광장 한 사내가 시계탑을 등에 메고 앉아 있다 어디에서나 삶은 고행이란 걸 미리 알아버린 듯 턱 괴고 앉은 등 뒤로 노을이 후광(後光)으로 퍼져 흐르고 있다 몇 개의 사막을 건너온 다 닳아빠진 운동화 바람이 기거하기 좋은 낡은 작업복 북서쪽에서 온 바람이 그를 알아보고 일으켜 세운다 덥수룩한 머리카락은 흔들리는 덤불숲 조금도 꼼짝 않는 몸 쓰러질 것 같은 가벼움이 세상 위에 떠 있다 말라빠진 몸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한 올 한 올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마다 한 눈금씩 돌아가는 시곗바늘 시계탑을 등에 멘 한 사내 턱을 괴고 앉아 있다 갈 길 바쁜 사람들 대신 역 광장 비둘기들만 우르르 모여들어 법문 듣듯 보리수나무 아래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시집/ 모란꽃 무늬 이불 ..

한줄 詩 2021.03.16

고구마 호수 - 이강산

고구마 호수 - 이강산 호숫가 늙은 여인이 고구마를 캔다 육지의 섬 같은 호수, 꽃을 든 청년이 성큼성큼 걸어가 닻을 내린 그 언덕배기 한사코 호수 쪽으로만 핏줄을 대던 고구마의 태를 끊고 있다 밭은 어느덧 붉은 호수다 봄마다 피어나는 청년의 붉은 꽃 같은 호수에 발목이 잠기는 줄도 모른 채 여인은 한 뿌리, 한 뿌리 호수를 캔다 짐작건대 호수의 뿌리를 어루만지는 저 여인도 한때는 꽃을 품은 청년이었을 것이다 나도 그런 날이 있었다 붉어지고 싶어서, 멋모르고 내 몸의 뿌리를 캐던 시절 그러나 지금은 고구마만 보아도 저절로 불어지는 때, 꽃을 깜박 잊고 왔는지 고추잠자리 청년 하나가 호수에 발을 담그다 떠난다 *시집/ 하모니카를 찾아서/ 천년의시작 이것저것 - 이강산 새벽차를 타려고 귀를 닦는데 귀에서 이..

한줄 詩 2021.03.16

누군가 부르는 내 이름이 - 김유미

누군가 부르는 내 이름이 - 김유미 병원 대기실에서 기다리는데 낯선 이름 하나가 귓가를 스쳐 간다 이름은 한 사람으로 다가와서 다중으로 사라졌다 이름을 벗기면 돌아가는 어지럼증이 되었다 혼자서 가다가 뜨거워져서 우는 낯섦 같았다 헛바퀴가 되어 주저앉는 이름 부르는 이름이 내 이름인지도 모르고 불쑥 손을 내밀어 잡아 주고 싶었다 이럴 때 이름이 내 말을 잘 들어 먹는 명사 같구나 생각한다면 어딘가에 세워 둔 우산의 기다림에 어딘가에 새겨 놓은 마음의 이면에 끝내 다다를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두 귀만 남아 몸만 일어서면 이름은 비척비척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시집/ 창문을 닦으면 다시 생겨나는 구름처럼/ 파란출판 술래 - 김유미 빛들이 눈을 쪼아 빠져나가는 증세 의사는 빛의 부리를 뽑는다는 약들을 처방해 ..

한줄 詩 2021.03.16

봄이 올 무렵 - 허림

봄이 올 무렵 - 허림 겨울에는 일이 없다고 대처로 막일 하러 간 사람들이 돌아올 때가 되면 강은 근육질의 얼음을 푼다 그 무렵이면 동네 사람들은 산으로 들어 고로쇠수액을 받거나 둠벙에 얼음 깨고 얼음사리 하는데 족대에 걸려든 고기의 눈빛 보고 올 농사 점을 치기도 한다 점이란 어쩌다 맞거나 틀릴 수 있는 일이건만 고기의 눈빛에 어린 점괘를 뽑아 어탕을 끓여 시린 속을 푼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시간 궁금해지는 나이가 되면 점괘가 보고 싶은 것 산그늘에 쌓인 눈이 녹아 덧물 져 밀려가고 삼월 하순 폭설이 하루쯤 발목을 잡는다 해도 봄이 오는 길목 창촌 별다방 정 마담은 노란 치마를 입고 아지랑이 커피를 내릴 것이다 *시집/ 엄마 냄새/ 달아실 신발 - 허림 사랑방 문턱은 내 이마에 난 혹을 기억하겠지 바람..

한줄 詩 2021.03.15

은하의 집, 불시착한 별들의 보호소 - 심명수

은하의 집, 불시착한 별들의 보호소 - 심명수 공명처럼 미확인물체가 감지되면 자꾸 이상한 생각이 나 어린 날 어떤 의도와는 무관하게 지구로 불시착했다는 생각, 생각이 떠돌던 그때는 상상의 비행을 하다 가벼운 농담처럼 지구로 떨어졌다고 생각했지 물론, 은하의 집은 지구의 크레바스 밤하늘은 자책과 원망의 무덤이었어 간혹, 천공은 무료한 자아의 탈출구이기도 했지 은하의 세계는 생각보다 생각이 미치질 못해서 화가 났지만 일생을 걸지 않으면 일생이란 없다는 걸 그땐 몰랐어 반짝이는 그물에 걸린 물고기, 화려한 우울증을 앓다가 목을 맨 인형이 떠올랐고 우울은 베갯잇처럼 실밥 터진 곳이라곤 없었어 죽은 인형은 보라 틀의 별자리가 되었다지 별자리를 잇다 보면 큰부리새, 황새치, 여우, 땅꾼, 돌고래라는 이름을 가진 이..

한줄 詩 2021.03.12

외로운 식사 - 김점용

외로운 식사 - 김점용 혼자서 주로 밥을 먹는 그는 외로움을 떠벌리는 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건 두고두고 먹는 일용할 양식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뜨거운 김을 내뿜으며 절규하던 밥솥도 그의 집에선 입을 꾹 다문다 입을 다문 채 벽 속으로 들어가 다정한 벽이 된다 김치냉장고도 말을 극도로 아낄 줄 안다 오래된 수박 속에서 그는 웅크린 채 잠을 잔다 다음날 검은 수박씨 같은 말들이 싱크대 위에 흩어진다 외로움의 둘레가 넓어질수록 별은 차갑게 뜬다 베란다에 가지런히 놓인 수저 태양의 누생이 다녀간 흔적들 역력해도 그는 이미 그렇게 되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우연이란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연이 아니고는 벗어날 수 없는 갑옷 같은 사방의 벽들이 혓바닥을 내밀어 감옥을 핥는다 그가 식사를 하는 시간이다 *시집/ 나 혼..

한줄 詩 2021.03.12

고로쇠나무가 인간에게 - 정기복

고로쇠나무가 인간에게 - 정기복 인간의 위장은 온갖 욕망들로 다양하나 나는 방어기제를 갖지 못했다 봄이면 득달같이 달려와 한 해 온전히 농축한 수액을 수령해 간다 나의 안녕이나 숲과의 조우 따위는 관심 밖의 일이다 내 줄기에 흐르는 푸른 피가 그들 몸 어떤 처방에 도움이 되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구멍 뚫고 호수 박아 얻고자 하는 육체의 환희를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이 내게 하는 가학은 온당치 못하다 나는 마조히스트가 아니다 숲의 정령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만물과 매한가지로 한 생명일 따름이며 우리네 날숨이 그네의 들숨이며 그네의 날숨이 우리네 들숨이다 멈추지 않는 호흡과 호흡이 숲을 이루고 숲이 없다면 그대들도 없다. *시집/ 나리꽃이 내게 이르기를/ 천년의시작 김광석 - 정기복 젖은 듯 보송..

한줄 詩 2021.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