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다섯 번째 계절의 유장한 말씀 - 배정숙

마루안 2021. 3. 6. 19:43

 

 

다섯 번째 계절의 유장한 말씀 - 배정숙


찌그러진 양재기에 보조개가 파인다
양 볼이 살팍해지는 소리

귓볼이 경쾌하고 환승하여 혀끝이 배부르고 환승하여 식도가 따듯하고 다시 환승하여 심장이 환하고 가로등엔 불이 켜진다

목마르게 우러르는 저 은총의 젓가락이 납작 엎드린 밥숟가락위에 포옥 빛의 알을 슬어 얹는다

이런 것 저런 것 퉁 쳐 봐야 한 뼘의 궁리조차 번번이 도막 나 버리지만 그보다 더 기막힌 기사를 덮고 더 깊은 울음 밑으로 순순히 몸을 뉘는 이여

저녁 새참처럼 잠깐 스치는 역광이 재재거리며 지나가고 하루치의 수행을 요약한 빈 소주병이 불콰한 저물녘인데 여전히 자유의 눈알만 붉다
풀썩
어두워지던 밤이 드디어 코앞에서 주저앉는다
그러면 그 때는 필경 맞이할 내일의 이름을 신에게 물으리
턱을 괴고 고민하던 신은 몇 번 출구로 도망쳤을까

 

앞뜰에 붉은 장미를 심었다가 검은 입술을 날개 속에 묻었다가 어쩌다 이리 한 장 낙엽으로 구르기는 사람의 훈기가 북적대는 이만한 곳 있으랴
맨재 속에 묻어둔 밑불 하나로 사계절 밖의 바람을 물컹하게 녹여주는 사람의 그늘
겨울과 봄 사이 다섯 번째 계절이 드리운 그늘의 온도다
그곳에 얼음 박힌 노숙의 맨발을 밀어 넣는 지하도의 밤


*시집/ 좁은 골목에서 편견을 학습했다/ 시와표현

 

 

 

 

 

 

더딘 치유 - 배정숙


네게로 건너려 했던 무지개가
실상(實像)인 줄 알았다
두근거림과 닮아있어 불온하던 말들이었다

날아가는 것이 새의 습성
머물렀던 자리 비릿한 온기는 흔적도 없고
주저앉을 듯한 능소화 별자리 하나
너의 빈자리를 부축하고 있다

딱 한 번만 울 수 있을까
오늘의 이 순환을 이해하지 못하면
누추한 구름은 수시로 비를 만들겠지
그리움은 나를 밀고 난 무작정 너로 흐른다

그냥 내가 사는 마을로 돌아온 다음
선 너머 하늘의 구름과 별의 안부를 기웃거리지 않기

울컥 길을 틀고 돌아보니
지는 해 붉은 연못에서 실족한 그림자가
낮게 젖는다
은하수는 발목의 통점 곁으로 밤새 흐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