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난전 - 손석호

마루안 2021. 3. 11. 19:38

 

 

난전 - 손석호


청량리동 길가의 뙈기밭입니다
도시라서 말끔하게 세수한 쑥 달래 냉이 씀바귀
달동네처럼 소복하게 모여 살아요
급하게 뜯어낸 푸성귀처럼
간신히 몸만 뜯어내 기차를 탔기 때문에
뿌리가 고향에 남아 있다는 생각 때문에
아직 뿌리내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사실은 바닥이 너무 딱딱했어요

빌딩 골 사이로 해 떠오르면
계절에 맞게 제철 푸성귀가 풍성하게 자랍니다
단지 뿌리내리지 못할 뿐
꽃 같은 게 피지 않을 뿐

등 뒤 도로에 차들이 쉼 없이 흐릅니다
강물에 뛰어들던 어린 시절처럼 몸을 던지고 싶을 때가 있지만
바라보기만 해요
조금 아플 것 같아서
어디로도 떠내려갈 수 없을 것 같아서

이곳에서 계속 푸성귀를 기르려면
소나기를 피하듯 단속원을 피할 줄도
밭을 통째로 옮기는 방법이나 가짜 안개로 은폐하는 요령까지도 알아야 하죠
푸성귀보다 먼저 물러지지 않으려면
바람이 통하게 마음에도 고랑을 내야 해요

모두가 돌아간 뙈기밭
슬픔이 뿌리내리지 못하게
허공을 견디는 가로등


*시집/ 나는 불타고 있다/ 파란출판

 

 

 



목욕탕 - 손석호


어느 집이든 깊숙이 들어가면
바랜 딱지만 다닥다닥 붙어 있는 빈 골목처럼 먹먹했고
휘는 지점마다 연탄재 쌓이듯 쉽게 때가 꼈다
가끔씩 찾아오는 일요일은
아버지의 숨겨진 안쪽 면이
내 몸에 낀 때를 비벼 밀어냈다
무엇이든 불리고 밀어내며 참았던 일이
쉼표였던 시절
가난의 속살은 언제나 빨갛게 부풀었다
따끔거렸지만 오고 있는 월요일처럼 자연스러웠고
시간은 몸속을 들락거리며 쉬지 않고 때를 만들었다

모래시계 속 자잘한 알갱이 같은
아득한 시간을 몇 번이고 뒤집어 봐도
당신은 억지로 떼어낸 딱지 속 살점처럼 짓물러 있고
세상은 목욕탕 속처럼 아직도 뿌옇다
벽에 걸린 오래된 거울은
사는 게 쌓고 벗겨내는 일이라는 걸 안다는 표정으로
아들에게 몸을 맡긴 아버지를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다.

 

 

 

 

# 손석호 시인은 경북 영주 출생으로 1994년 공단문학상, 2016년 <주변인과 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나는 불타고 있다>가 첫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