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몽골 소년의 눈물 - 안상학

몽골 소년의 눈물 - 안상학 염소가 풀을 뽑아 먹는 동안 사막은 저도 모르게 조금씩 넓어지고 있다 더 막막해져 가는 사막에서도 지금 여기 없는 꿈이 지금 여기 있는 아픔을 위로할 수 있을까 사막의 한 줌 낙타 똥 같은 어느 마을 할아비 밑에서 자라는 어미 아비 없는 소년을 만났다 할아비는 사위 집에 손자를 맡기고 떠났다, 멀어지는 트럭 발을 동동 구르며 마구 허공을 할퀴던 조막손 소년은 마을 어귀 모래언덕까지 올라가 한참을 바라고 서 있었다 몽골은 눈물이 드물다는데 소년의 눈물 광막한 곳에서는 헤어지는 시간도 길었다 지금 여기 없는 꿈이 지금 여기 있는 아픔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몽골식 이별을 보면서 양고기칼국수를 먹으면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나라에서 여태 만나 온 삶의 아픔과 그래도 살게끔 한 꿈..

한줄 詩 2021.03.29

아버지의 꽃 - 이서린

아버지의 꽃 - 이서린 어시장 왁자한 어물전마다 커다란 고무 통 찬물에 잠긴 다발다발 무수한 주홍빛 돌기 봄이다 어린 딸들은 마루 끝에 앉아 햇볕을 받고 어머닌 수돗가에서 멍게를 손질하였고 맨드라미 꽃씨를 심는 아버지의 손목에 선명한 힘줄 가장의 의지가 꿈틀거렸다 이윽고 작은 술상이 차려지고 아버지는 손을 비볐다 맛있는 것을 앞에 둔 아버지의 버릇, 햇빛에 반짝이는 술잔 알싸한 멍게향이 일요일 오후에 스몄다 딸 셋을 나란히 앉혀 놓고 붉은 낯빛의 아버지는 부드러운 저음으로 선창을 불렀고 음치에 가까운 어머니의 봄날은 간다가 이어졌다 얘들아, 아버진 말이다 봄이 오면 멍게가 단연 좋더라 이 바다 냄새가 참 좋더라 바다에서 피는 꽃 같지 않냐 초장에 찍은 멍게를 먹이려는 아버지와 한사코 싫다는 딸들의 실랑이..

한줄 詩 2021.03.28

한때, 우리들의 파란만장 - 이기영

한때, 우리들의 파란만장 - 이기영 창밖에는 잎 하나도 달지 않은 나무 한 그루 나무는 가장 추운 방식으로 눈보라와 마주하지 허기를 반죽하는 손목이 시리고 봄을 향해 부푸는 파일들을 딸깍, 딸깍, 하나씩 열어 볼 거야 그때 2월과 7월 날아가면서 떨어뜨린 새의 깃털보다 가벼이 떠나 버린 그녀와 그녀를 잠깐 떠올릴 거야 지금까지 어쩌다 12월까지 말 한마디 없이 그녀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계속해서 불면에 시달리는 밤들을 목 조르며 견디지 않겠어 달은 이미 다 부풀어 올랐고 이제 그만 모든 기다림을 지워야겠어 나는, *시집/ 나는 어제처럼 말하고 너는 내일처럼 묻지/ 걷는사람 난간 - 이기영 신발을 벗고 물속으로 뛰어드는 사람들은 그곳의 계절을 몰라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보라를 위로하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

한줄 詩 2021.03.28

징한 것 - 김보일

징한 것 - 김보일 나에게 커피는 '달다'와 '쓰다'밖에 없다 아는 커피의 이름이라고는 아메리카노 하나 수많은 와인의 종류도 내게는 그저 감당하기 힘든 외국어일뿐이다 돌아가신 할머니에게는 자동차가 그랬다 소나타, 그랜저, 프라이드... 굴러가고 멀미나는 것들은 모두 그냥 '차'였다 젊어 과부가 되고 장가도 가지 않은 두 아들을 잃은 할머니에게 아리고, 저미고, 울멍울멍한 것들은 모두 '징한 것'이었다 만질 수도, 뱉을 수도 없는 것들이었다. *시집/ 살구나무 빵집/ 문학과행동 봄비1 - 김보일 분홍 꽃도, 펄럭이는 치마와 도둑고양이와 이팝나무도, 빨간 자동차와 전봇대와 낡은 처마도, 술에 취한 친구의 구겨진 구두와 할머니의 리어카와 개밥그릇도 비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살구나무 빵집 - 김보일..

한줄 詩 2021.03.28

꽃들의 경련 - 김윤배

꽃들의 경련 - 김윤배 산수유가 노랗게 치정의 말들을 버리고 진달래가 욕정을 못 이겨 질펀하게 누웠다면 꽃들의 경련을 본 것이다 꽃들은 치정과 욕정 사이에 길게는 열흘간의 생애를 던진다 꽃잎 한 장에 달그림자를 그리고 꽃잎 한 장에 비탄을 그리고 뛰어내리는 그곳이 대지거나 강물이거나 낙화의 순간은 숨 막히는 적막이어서 그걸 보았다면 진실에 가깝다 그곳은 어둠의 숲이거나 소신의 꽃불이다 대리석 바닥에 새겨진 명문은 숨겨졌던 연서였다 꽃잎에 새겨져야 거미줄 위로 파경을 옮길 수 있다 한 생애, 꽃잎 뛰어내리는 순간 *시집/ 언약, 아름다웠다/ 현대시학사 반생 - 김윤배 원망과 냉소로 반생을 가시밭에 두었습니다 원망과 냉소는 목련꽃 짧은 생애에서 크고 깊습니다 가지를 옮겨 앉는 새들이 종일 눈길 주던 목련꽃은..

한줄 詩 2021.03.27

플라스틱 - 조성순

플라스틱 - 조성순 환타스틱하게 온갖 것들을 담을 수 있는 도구 너무 친숙하여 공기나 물과 같이 되었지. 가볍고 깨지지 않아 이곳 생활을 마치고 은하계로 떠날 때 필수 지참품으로 갖고 가고픈 것 지천으로 흔하여 귀하지 않게 된 것 박을 길러 여물 때까지 기다리거나 불을 때서 옹기를 제작하는 수고로움을 덜어주는 어느 순간 너 없는 세상은 생각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물을 담는 용기로는 제격 둥둥 뜨는 데는 그야말로 플라스틱은 환타스틱 어린 코끼리는 거친 풀잎보다 부드러운 플라스틱을 좋아하지. 고래 배 속에도 들어가고 스스로 진화하여 바닷가 바위에도 껌딱지 모양 붙어 생물인 체도 한다. 거북손 미역 파래와도 영역 다툼을 한다. 금 간 다리도 붙여 주고 상처 입은 내 영혼에도 와서 벌어진 틈을 메워 주어라. ..

한줄 詩 2021.03.26

살아남은 죄 - 이산하

살아남은 죄 - 이산하 ​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으로 세상이 폭발 직전일 때 키 큰 한 젊은 노동자가 광화문 광장에서 '살인마 전두환을 처단하라'고 외치며 분신했다. DJ, YS를 비롯한 재야인사들이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죽을 줄 알았던 노동자가 '기어이' 소생해버리자 그들은 더이상 병원을 찾지 않았다. 박종철의 관에 또 하나의 관을 쌓아 연쇄폭발시킬 큰 호재가 사라져 내심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노동자는 살아난 것이 죄여서 30년이 지난 아직도 우울증을 앓으며 자기 몸의 불을 꺼준 사람들을 원망하고 또 원망하고 있다. *시집/ 악의 평범성/ 창비 운동화 한 짝 - 이산하 반쯤 창문이 열린 신촌 노고산 '이한열기념관' 유품 전시실 원래대로 복원된 바스러진 흰색 타이거 운동화 한 짝 여전히 맨 ..

한줄 詩 2021.03.26

버드나무로 올라가는 강물 - 박승민

버드나무로 올라가는 강물 - 박승민 등이 퍼렇게 얼어붙은 배(腹) 밑으로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파랑은 또 물컹, 물컹 흘러간다. 같은 몸이지만 다른 표정으로 한때, 밭에서 막 뽑아낸 배추 포기처럼 푸른 시절이 우세한 적 있었지만 폐나 위장, 내 기억의 일부는 수장고 속에서 죽었거나 죽어가는 중 아침마다 썩은 구취가 장롱 가득, 하품하는 입으로 아침 해가 들어온다. 몸이란, 죽은 시간과 살아 있는 시간이 겹치면서 서로 충돌하면서 그 무엇으로 살아가는 수로(水路). 어두워지는 한복판에서 빛을 오래 잡고 허물어져가는 물의 반짝이는 등을 본다. 죽은 몸이 푸른 봄을 허공에 걸어놓았다. 살아 있는 작은 잎이 관(棺)을 뚫고 시퍼런 꼭대기까지 삶을 끌고 간다. *시집/ 끝은 끝으로 이어진/ 창비 끝은 끝으로 이..

한줄 詩 2021.03.23

오늘의 작법 - 전형철

오늘의 작법 - 전형철 눈물짓되 눈물 흘리지 말 것 삶의 단어로 내 선 곳에서 가장 먼 데로 찌를 던질 것 열 번을 읽어도 모르는 것은 피돌기가 맞지 않음으로 과감히 폐기할 것 관념으로 휘젓고 감각으로 쓸 것 제목과 내용은 처가와 고부(姑婦)의 거리로 정위치시킬 것 미소와 울음을 양날의 검으로 삼을 것 신(神)보다 귀(鬼)나 마(魔)와 친분을 유지할 것 태양을 피하되 촉기를 잃지 말며 취하지 않음을 경계하고 만나는 것들의 이름으르 다시 지을 것 길은 돌아가되 마주할 작은 기적을 놓치지 말 것 세 단어로 말하고 한 줄을 소중히 할 것 기한을 지키지 말고 물고기를 잡지 말며 새의 길을 따르지 말고 바다와 허공을 문신으로 새길 것 채무와 추방을 지병 삼고 장수를 포기할 것 후손을 걱정하지 말고 이 별에 다시 ..

한줄 詩 2021.03.22

정 안 주는 연습이 필요하다 - 정선

정 안 주는 연습이 필요하다 - 정선 빌어먹을, 불안이 템버린을 흔들며 낙산 골목을 통과했다 단 한사람이면 족했다 제아무리 단단한 소금벽들도 혀로 허물어지고 두 손을 묶는다 해도 퇴색은 오는 것 이별은 단계학습이 필요치 않아 눈빛을 마주치고도 못 본 척 즐거이 웃는 잔인한 맥주잔 너머 그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던가 거품을 바탕그림 삼아 오 초의 눈빛을 견디니 결별은 더욱 견고해졌다 결별은 떫은 말, 어떻게든 살아내야겠다는 캄캄한 의지 애초에 누군가와 무엇을 도모한다는 건 내겐 슬갑도적 같은 일 금관을 쓰고 배꼽에 피어싱을 한 그는 이제 바람의 소유물이 되었다 나는 증오로 살아냈다 그러니까 증오는 숨탄것들의 부드러운 절규 증오가 민달팽이로 귓불을 핥았다 까똑, 스마트폰은 저 홀로 공중에 응답하고 덮어쓰시겠..

한줄 詩 2021.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