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화 전입 - 박병란
섬의 앞마당에는 바람이 전부였다
햇살이 바람을 이길 수 없는 곳
바람 없는 날도 바람을 볼 수 있는 곳
키 큰 나무 몇 그루라곤
죽은 전봇대가 유일하게 살아 줄을 타는 곳
전깃줄에 앉아 똥을 싸는 까마귀의 일몰과
시차를 겪는 수선화의 입장
전입한다고 다 주민이 되는 것은 아니더군요
이쪽으로 돌아눕다가 저쪽을 기별하는
물잔디같이 납작한 말
천천히 듣다보면 좌표 잃은 바람처럼 딱지 앉는 말
여기서 나는 익명이었다
방편 없이 문을 나서는 외지인의 등 뒤로
소란 없는 바람의 착지
참견만큼 친절한 것이 또 있겠는가 생각한다
수선화가 피어난다
표정을 표정으로 갚지 않으며 서두르지 않으며
*시집/ 우리는 안으면 왜 울 것 같습니까/ 북인
화답 - 박병란
핀 꽃보다 피지 않은 멍울을 더 많이 담아왔다는
사진을 보며, 눈이 매워지는 까닭은
지금은 가고 없는 멎은 마음 같아서
더는 기다릴 일 없는 사람의 모국어 같아서
자꾸 뒷걸음 치던 어느 봄날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기다리는 일이 마음 뜨거워지는 일이어서
햇살 품은 쪽이 먼저 말문을 열 수밖에 없겠지만
정해진 순서가 없는 부고처럼 문득문득 잊혀지는
이름이 소풍 가자고 조르는 것도 같습니다
혹여 핀 꽃보다 외마디 자음 같은 멍울에 애정이
간다면 당신은 참 좋은 사람입니다
첫 매화 아껴가며 찻물 내릴 때
이쪽저쪽 봄의 좌판 오붓하고
뒷걸음 치던 사랑 보자기에 싸두었다가
볕 좋은 날 우려내주거나 받다 취하여도 좋습니다
새해 다짐 따위 다 잊고 사는 나는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 박병란 시인은 경북 포항 출생으로 2011년 계간 <발견>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아내는 안의 해,라는 기별이라지요>, <우리는 안으면 왜 울 것 같습니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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