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마지막 항구에서 - 이형권

마지막 항구에서 - 이형권 어제는 항구에 가서 그대를 보았다 머지않은 눈보라의 예보가 그물처럼 내리고 저마다의 가난과 행복을 한 두릅씩 흥정하는 인파 속에서 흰 파도처럼 웃어 대는 그대를 보았다 불현듯 그대가 그리운 날이면 나그네처럼 항구를 헤맨다 먼 바다의 추억으로 몸을 흔드는 깃발들 회선의 싸이렌이 울고 무인등대 사무친 외침 속에서 바다의 꿈을 홀로 적시는 그대의 노랫소리 나는 그대를 향해 나그네의 길을 준비하리라 땅거미를 밟고 초병들이 들어서기 전 집어등 같은 희망을 달고 떠나가리라 흉어기의 뱃전에 그물코를 건져 올리며 그대의 겨울을 향해 떠나가리라 *시집/ 칠산바다/ 문학들 등대 - 이형권 쓸쓸하구나 내 마음은 언제나 해 지는 등대 밑을 떠돌았으니 그대 먼 곳으로 떠나갔을지라도 옛 생각에 슬며시 ..

한줄 詩 2021.05.27

환절기 - 이용호

환절기 - 이용호 한때 당당하던 그의 지문은 간 데가 없다 슬그머니 개인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손가락의 무늬를 그리워하다가 새벽 첫 버스를 놓쳤다 마지막 회를 향해 가는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인력 소개소를 향해 전력 질주한다 새벽 추위에 떨고 있던 개 한 마리 시선이 그와 마주치자 맹렬하게도 짖어댄다 아침부터 소주잔이 급속하게 이동한다 아픈 만큼 마시는 건지 마셔서 아픈 건지 모를 사람들이 피워 놓은 장작불 속에서 서로를 외면하던 눈동자들이 서럽게 울어 대기 시작한다 주민등록증을 건네고 하루를 저당 잡히는 그의 한숨 소리가 사무소 계단에 쌓여 갔다 여기저기 떨어진 단풍잎들은 저마다의 하루를 계산해 본다 그도 이번 생에 이루지 못한 것들의 목록을 적어 보다가 다음 생에서는 어떤 목록을 가진 이파리로 나무..

한줄 詩 2021.05.26

내가 앉았던 자리에 대한 예의 - 최세라

내가 앉았던 자리에 대한 예의 - 최세라 플라스틱 의자 네 개가 무릎을 붙이고 앉아 국화꽃 화분을 내려다 본다 오월이라서 무성한 잎사귀만 있고 아치형 철제기둥엔 녹꽃이 너댓 무더기 피어있다 아무것도 미동하지 않았다 수면은 손바닥으로 깎아낸 한 됫박의 곡식 같았다 바람도 스치지 않았고 그림자도 없었다 물은 물인 채 부풀고자 했으나 아직은 아니었다 녹슨 함석 담장 옆으로 모래가 쌓여 있었다 첫삽을 뜬다면 얼마만큼 파일까 사람이 서 있는 자리마다 길이 갈라지고 있었다 줄일 수 있는 데까지 볼륨을 낮추며 내가 앉았던 자리를 위해 오늘은 아무도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시집/ 단 하나의 장면을 위해/ 시와반시 손끝 - 최세라 엉겅퀴 피는 계절이면 보랏빛 입술 바르고 건천에 엎드리고 싶다 가뭄이 할퀴고 간 미소와 마..

한줄 詩 2021.05.26

천장(天葬) - 강신애

천장(天葬) - 강신애 나는 야크 똥을 주우러 다니던 아이 설수로 목을 축이던 소녀 놋주발을 돌리던 라마승이네 죽은 것 다시 죽여 살아나는 활개 냄새가 다른 피, 코와 팔다리를 삭혀 부유하는 천년의 짐승이네 나는 높은 곳 연모하던 살점들이 빛으로 짓고 빛으로 글자를 써 빛의 헝겊을 날리는 하늘사원의 전서구 모든 길은 허공으로 통해 부풀어오른 설풍마저 질긴 구애를 하네 신조(神鳥)도 설산에 푸른 그림자를 매달고 까마득한 공복에서 출발하네 긴 겨울과 희미한 볕뉘의 제물 누군가의 전 생애가 불이 되고 물이 되어가는 곳에 발톱과 초점이 나의 전부일 뿐 땀에 젖은 모자가 세 번 원을 그릴 때 튕기듯, 붉은 언덕으로 *시집/ 어떤 사람이 물가에 집을 지을까/ 문학동네 장갑 - 강신애 무덤에 바칠 꽃 한송이 가져오지..

한줄 詩 2021.05.26

아버지와 망원경 - 김재룡

아버지와 망원경 - 김재룡 다락방에 바라다보는 우묵한 정릉 골짜기, 건너편 봉국사 옆 산림조합으로 이른 새벽 잡역부로 일 나가는 어머니. 북악터널을 빠져나온 장의차가 심심찮게 보였다. 배밭골 쪽에서 불어오던 바람이 방향을 틀어 청수장 깊은 골짜기로 먹혀 들어간 다음엔 장마철 한때 굵은 빗줄기들이 온통 도깨비장난 하듯 퍼붓기도 했다. 귀신 나온다던 폐허였던 경일고등학교 자리에 웬 학교 건물이 그렇게 크게 들어설 줄 누가 꿈에라도 생각했을까. 거대 건물이 빼곡히 들어선 학교 쪽을 왼편으로 눈 흘기며 치어다보는 비탈진 언덕 비탈진 셋집 다락방에서 건너다보는 북악스카이웨이며 남산의 불빛은 어찌 그리도 휘황하던지. 어머니는 여섯 살이 된 나를 데리고 개가하여 밑으로 동생 둘을 보았다. 큰아들 대학 졸업시키고 결혼..

한줄 詩 2021.05.23

잘 가라, 세상 - 임성용

잘 가라, 세상 - 임성용 우리는 쉬지 않고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죽고 싶어도 사는 사람들 우리는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사람들이다 살고 싶어도 죽는 사람들 다녀올게요 오늘까지 일하고 나는 죽었어요 저녁부터는 쉬어도 돼요 내일은 깨우지 마세요 어머니는 시커멓게 타버린 나를 낳았어요 꿈도 없는 아버지는 나에게 꿈을 묻지 않았어요 당신은 달아나는 꿈을 얼마만큼 쫒고 있습니까? 당신의 꿈은 누구의 편입니까? 우리는 탈출하지 못했다 우리는 순식간에 갇혔다 우리는 한꺼번에 죽었다 우리는 보통 떼죽음을 당했다 우리들의 시체는 여기저기 분산되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세상은 불덩어리였다 구급차는 날마다 우리에게 달려온다 우리를 태우고 떠나기 위해 줄지어 기다린다 나도 내 얼굴을 알아볼 수 없다 나는 내가 이렇게 죽을..

한줄 詩 2021.05.23

바닷가 마지막 집 - 손음

바닷가 마지막 집 - 손음 햇살이 꼬들하다 무거운 고요가 더러운 개 한 마리를 끌고 다니는 정오 빨간 다라이에 핀 접시꽃이나 본다 채반에 널린 납세미나 본다 상자같이 허술한 집에 건들건들 한 채의 배를 타고 앉은 듯 달포째 저렇게 잠겨있는 사내, 이런 개... 설핏한 나이에 죄다 욕으로 마시는 소주를 뭐라 말할까 모든 걸 다 떨어먹고 여기까지 와서 생이 이렇게 요약될 줄 몰랐다 그래 어쩔래, 나 이제 고집 센 쉰이다 창문도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 사내를 닮은 집도 말이 없다 그 둘이 서로를 껴안고 있는 동안 사내는 선창가나 한 바퀴 돌까 말까 천막 횟집에 상추 쌈을 싸 주느라 난리도 아닌 커플이 입이 찢어져라 좋아 죽는다 확, 불이라도 싸지르고 싶은 저녁이라면 어쩔 것이냐고, 파도 소리 귀에 고이도록 쉰을..

한줄 詩 2021.05.23

분홍주의보 - 배정숙

분홍주의보 - 배정숙 5월의 젖을 물고 있는 네 피부는 부드럽기도 하구나 네가 피어나는 소리에 한잠도 못 이루고 기어이 눈앞에서 스캔되는 분홍 5월과 궁합이 잘 맞는 색 빛의 잔망스러운 입술 그 한 점의 고집에 멱살을 내어주게 되면 오염인지 감염인지 흐드러진 향기는 참으로 위험한 구름인자입니다 그러니 눈치 없는 에로스는 키스를 조심해야합니다 분홍의 낙화 유혹은 하르르 봄을 따라서 쉬 지는 것 조심해야 할 것은 달콤하고 붉은 것은 오직 불안합니다 꿀이 흐르고 팡파르를 울리고 날고 싶은 길만 자꾸 날고 싶은 것은 분홍을 오독하는 때문입니다 한걸음 뒤로 물러나 보면 가시가 보이게 되는 것을 바람도 한 때 다정한 분홍의 방향으로 기울어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던 적이 있습니다 살얼음을 딛고서도 거짓말처럼 잠깐 전..

한줄 詩 2021.05.22

죽음 밖 어디쯤 있을 나 - 심명수

죽음 밖 어디쯤 있을 나 - 심명수 언제쯤이었는지 짐작도 할 수 없다 하지만 거미는 결코 죽을 생각은 없었던 걸로 알고 있다 거미가 몇 초 동안 살아 꿈틀꿈틀한다 주검의 날개가 겨드랑이로부터 돋아난다 미동도 없이 거미는 자꾸 허기를 느끼곤 한다 아까 먹다 만 치킨 날개를 후회한다 주검, 왠지 살아 있을 때보다 정신이 멀쩡하다는 느낌 하지만 마취가 풀리듯 점점이 암막처럼 펼쳐지는 빛 그물에 걸려 빠져나오지 못하던 날벌레들의 절박했던 순간, 등골이 환해진다 일상이 투시되던 생, 생이란 몇 층에서 누굴 만났다 몇 층으로 미끄러지는지 개인 사생활 차원에서 거미들에겐 논란의 여지가 없을 리가 없다 전생에서도 이승에서도 나의 빌어먹을 습성은 변함이 없다 빈손에 가방도 없어 고만고만한 인연 주렁주렁 관념들로 꼬여 또..

한줄 詩 2021.05.22

위험하다 스치기만 했는데 - 이기영

위험하다 스치기만 했는데 - 이기영 기를 쓰고 달아나는 걸 붙잡아 매달아 둔 발이었다 투명하지 않아서 상처 뒤는 더더욱 알 수 없고 빛의 행방을 쫓아 빨리 뛰어가는 심장이었다가 희미한 광기를 완성하면 비로소 반짝이는 눈물이었다가 난무하는 추측이었다가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을 숨기기 좋은 딱 그만큼의 달빛이 스친다는 건, 반쯤은 다른 타인으로 속수무책으로 지우고 싶은 지워지고 싶은 것들을 꺼내 눈먼 사람 몰래 흘리고 가는 것 그것은 차마, 나를 말할 수 없는 것 *시집/ 나는 어제처럼 말하고 너는 내일처럼 묻지/ 걷는사람 환절기 - 이기영 묶여 있는 개가 미동도 없이 바라보고 있는 곳에 나비가 난다 나비는 꽃이 일러 준 방향으로 날아가고 바람이 멋대로 동작을 바꾸면서 계속해서 나비를 흔들어도 그걸 춤이라고 ..

한줄 詩 2021.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