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중년의 귀가 - 허진석

중년의 귀가 - 허진석 꿈속에서는 조금 더 멀리 여행하며 조금 더 가난하다 오래전 여행 책자에 나온 호수와 가게가 사라지고 없다 돌아오는 기차가 끊겼거나 환승 택시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집에 가는 버스는 늘 붐비고 낯선 사람 가득하다 오래전에 죽은 친구가 어린 얼굴로 나타나 손을 흔든다 운전수는 아는 길로 가지 않는다 골목은 변했고 아무도 없다 망각은 통증이다, 주방에서 보글보글 기억이 끓어넘친다 집 전체가 앓는 이 저녁 식구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시집/ 아픈 곳이 모두 기억난다/ 파란출판 중년 2 - 허진석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그날 마지막 버스가 떠났다 물 고인 종점 내 몫의 짐을 지고 달려간 그곳 밤이 깊었고 흘러간 사나이들은 뱀을 사냥하는 곰과 오래전에 먹은 우럭회 얘기를 하며 늙어 가고 있..

한줄 詩 2021.05.10

아침이라는 영정사진 - 천수호

아침이라는 영정사진 - 천수호 푸르스름한 수염으로 그가 왔다 이 땅의 청년으로 다시 오지 않을 듯이 사진 속에서만 햇빛 웃음이다 웃는 얼굴에 침 뱉지 못한다는 세상에서 살아왔지만 간혹 가래침을 맞는 영상이 뜨기도 했다 멱살 잡히는 장면은 뉴스감이 되지도 못했다 암청색 바탕화면에 검은 형상들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아침은 그런 것이다 주검으로 정지되었던 사물들이 창을 내고 빛을 반짝이기 시작한다 이런 영상은 매일 볼 수도 있지만 이미 죽어가는 오늘 아침은 내일 그를 볼 수 없는 것처럼 단단한 사각 틀 안에 있다 가만히 들어보면 화면 밖에서는 목련이 핀다는 봄의 말이 말이 들리지만 발인의 국화 향기가 줄을 서는 아침이다 꽃잎은 빳빳하지만 이 흰 꽃들에게 정규직이라는 꽃말은 없다 웃음이 정지된 사진으로는 ..

한줄 詩 2021.05.05

구석에서 울다 - 박인식

구석에서 울다 - 박인식 방랑보다 황홀한 인생은 없어 내 인생 지금껏 길 위에서 황홀했네 집 구석구석에는 방랑길의 나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머무르지 못하는 내 생애 앞에 쭈그려 앉아 울고 있는 줄 모르고 이제야 간신히 어디로도 떠나고 싶지 않을 무렵 볕들 날 없던 그 구석에는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시간이 아니라 아이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내 시간이 나이 저문 줄 모르고 허리 꺾어 울고 있네 *시집/ 언어물리학개론/ 여름언덕 어느 활자중독자의 무인도 표류기 - 박인식 #1 어느날 빈 라면 포장지 하나 파도가 실어다 주었다 읽을 거리가 포장지 라면 조리법밖에 없어 허기를 숨 쉴 때마다 읽어야 했다 조리할 때 파와 달걀을 곁들이면 더욱 맛이 좋아집니다 #2 처음 읽는 이름의 라면이었다 뽀뽀라면 조..

한줄 詩 2021.05.05

사람론 - 김형로

사람론 - 김형로 말씀하셨지 꽃 꺾지 마라 겨울눈 맵찬 바람 삼킨 것이라고 보는 것조차 눈치껏 하라 하셨지 시샘한다고 꽃뿐인가 술도 사랑도 제 몫 다 하면 가야 된다고 눈물로 참으라 하셨지 정해져 있다 해도 꺼내 쓰는 건 사람마음이라고 무엇보다 사람을 아껴 쓰라 하셨지 꽃만큼 귀하다고 뼈 없는 혀로도 꺾인다고 정도 헤프면 독이 된다고 *시집/ 백 년쯤 홀로 눈에 묻혀도 좋고/ 상상인 손님 - 김형로 제 고집대로 살 때는 서운하기도 하고 때론 미워도 곤히 자는 모습 보면 핑- 스치는 생각 그래도 손님 아니냐 아비라고, 그늘이라고, 품이라고 가난한 숲을 찾아온 새 아니냐 다가와 쉬는 게 얼마나 고맙냐 니 아니고 누가 찾아왔더냐 문을 살며시 닫는다 산다는 게 다 내게로 흘러드는 강이더라 길이더라 제게로 이어지..

한줄 詩 2021.05.03

나는 누구인가 - 박영희

나는 누구인가 - 박영희 유년의 토방에서, 혼자 소꿉놀이하다 사금파리 조각에 베이던 순간 방글거리는 햇살과 유일한 장난감에 느꼈던 배신감 아직도 여린 쓰라림이다 사춘기 시절, 맞받아쳐줄 반사 벽이 없어 변변히 반항도 못 해보고 웃자라버린 영악성이 스스로 가여운 내밀한 쓸쓸함이다 빛 눈부신 청춘, 이었노라고 우쭐거릴 수 없는 올라가기 힘든 나무에 사다리도 걸쳐보지 못한 앙금 이따금 신물이 되어 오르내리는 울렁임이다 유치한 채로 사람살이의 진실이 담긴 유행가 가사처럼, 어느 곳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챙겨줄 "살뜰한 당신" 하나 숨겨놓지 못한 숙맥이다 남들보다 잘 달리지 못하고, 이쯤에서 문득 뒤돌아보니 이쪽저쪽 감당해야 할 책임만 잔뜩 걸머진 채 오도 가도 못 하는 노을빛 아득함이다 때때로 일탈을 꿈꾸며 ..

한줄 詩 2021.05.03

꽃 같은 그 사람 - 박용재

꽃 같은 그 사람 - 박용재 부서질까 봐 만질 수도 없고 멀어질까 봐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네 그리워할 수 있어 행복한 흰보랏빛 그 사람 조금 떨어져서 봐야 더 아름다운 제비꽃 같은 그 사람 *시집/ 꽃잎 강릉/ 곰곰나루 심향(心香) - 박용재 봄기운에 꽃 핀다고 쉬이 기뻐 말고 부는 가을바람에 꽃 진다고 가벼이 슬퍼 마라 꽃의 피고짐은 영원하나 꽃을 바라보는 시간은 너무나 짧기만 하다 사랑하는 사람아 세상 어느 꽃향기인들 그대 가슴에서 피어나는 마음향기만 하겠는가 # 박용재 시인은 강원도 강릉 출생으로 1984년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 , , , , , 등이 있다.

한줄 詩 2021.05.02

가족 - 석미화

가족 - 석미화 검은 산 아래 귀신집 살림살이라고 누가 써놓고 갔다 봄날, 귀신같은 사람들하고 살아가는 시간이 길어졌다 내일 언제 떠난다고 했지 뜨거운 냄비를 상 위에 올려두면 문이 저절로 열리고 닫혔다 술병이 쌓인 만큼 돌아갈 길은 더 멀어졌다 바깥만 바라보는 일에 반쯤 혼이 나간 여자는 가족은 그러면 안 되지, 중얼거렸다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참, 그렇지 비 오는 날에는 맑게 앉아서 앞으로의 거처들을 말했다 조용한 분위기가 이어지다가 점차 거세지는 빗소리가 들렸다 해야 할 말보다 하고 싶은 말만 쌓여갔다 검은 산에 불타는 얼굴이 겹쳐 보이고 천장에서 거미가 내려오고 밤에 보는 거미는 불길하다며 서로를 몰아세웠다 그래도 여기 살 만하지 비가 그치면 이만한 데가 없지 분명 누가 돌아보았는데 다..

한줄 詩 2021.05.02

모르는 사이에 - 김점용

모르는 사이에 - 김점용 나는 왼쪽 엉덩이가 없어요 그래서 걸을 때 몹시 절어요 절룩절룩 다리가 바람인형 팔처럼 멋대로 움직이죠 그가 언제 떠났는지 정확히 몰라요 긴 수술 후에 잠이 들었고 깨어나 보니 사라지고 없었어요 왼쪽 엉덩이를 무척 사랑한 애인이 가져갔는지 몰라요 애인도 엉덩이도 연락이 되지 않아요 언제쯤 돌아올까요 늦더라도 오긴 할지 어쩌면 영영 안 올 수도 있겠죠 의사 선생님은 끝까지 희망을 가지라지만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벌써 삼 년이 다 돼 가는 걸요 모르는 사이에 꽃이 피고 아이들이 자라듯 오늘은 저도 모르는 새 비가 왔네요 비가 오고 또 무엇이 올지 몰라 바깥에 놓인 의자를 조금 기울였어요 의자 왼쪽에 고인 물이 가만히 흘러내렸어요 *시집/ 나 혼자 남아 먼 ..

한줄 詩 2021.05.02

시간은 마디를 가졌다 - 오두섭

시간은 마디를 가졌다 - 오두섭 뚝뚝 잘려지는 마디가 몸 어디에 붙어 있는 게 분명하다. 시간은, 날개를 달았을 뿐인데 그 날개인 듯 창문을 뚫은 햇빛을 타고 들어와 내 앞에 툭 떨어진 벌레 한 마리 파르르, 불시착의 날개를 접고는 꿈쩍 않는다. 등딱지가 꽤 무거워 보인다. 그러고 보니, 여러 개의 팔다리와 무척이나 민감한 촉수, 숨 가쁜 핏줄들 하지만 후진하는 날개는 없는 낌새다. 불현듯 내려다보니, 햇빛의 울타리가 아까보다는 조금 좁혀진 듯하다. 내 쪽에서는, 분명 차 한 잔 데워질 무렵 저 벌레는 아직껏 햇빛 위에 그대로다. 내가 못 본 사이 몇 걸음 걸어갔던 것, 햇빛을 따라갔거나, 아니면 피해갔거나, 자기 생의 한 고비를 가까스로 넘겼을 시간 내가 졸음에서 다시 책갈피를 여는 오후 2시쯤 *시집..

한줄 詩 2021.05.01

마스크와 보낸 한철 - 이상국

마스크와 보낸 한철 - 이상국 -코로나 19를 견디며 살다 살다 그깟 마스크를 사려고 약국 앞에 줄을 설 줄이야 그래도 고맙다 신통한 부적처럼 우환을 막아줘서 고맙고 속이 다 내비치는 안면을 가려줘서 고맙고 세수를 안 해도 사람들이 모르니까 더 고맙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육이오 동란까지 겪고 또 겪고 살다 살다 마스크 대란이 올 줄이야. 저들은 보이지도 않고 소리도 없는 벌레 군단 국경도 인종도 가리지 않는 인류 침공에 어벤저스 슈퍼히어로들도 속수무책인데 귓바퀴가 없으면 걸 데도 없는 저 손바닥만 한 천 조각이 지구를 구할 줄이야. 모든 화는 입으로 들어온다기에 쓸데없는 말 안 하고 나를 아끼고 남을 존중하며 마스크와 한철 보내고 나니 아무래도 내가 좀 커진 것 같다. 나라도 이전의 나라는 아닌 것 같다..

한줄 詩 2021.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