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천장(天葬) - 강신애

마루안 2021. 5. 26. 22:26

 

 

천장(天葬) - 강신애

 

 

나는 야크 똥을 주우러 다니던 아이

설수로 목을 축이던 소녀

놋주발을 돌리던 라마승이네

 

죽은 것 다시 죽여 살아나는 활개

냄새가 다른 피, 코와 팔다리를 삭혀 부유하는

천년의 짐승이네

 

나는 높은 곳 연모하던 살점들이

빛으로 짓고 빛으로 글자를 써 빛의 헝겊을 날리는

하늘사원의 전서구

 

모든 길은 허공으로 통해

부풀어오른 설풍마저 질긴 구애를 하네

 

신조(神鳥)도 설산에 푸른 그림자를 매달고

까마득한 공복에서 출발하네

 

긴 겨울과 희미한 볕뉘의 제물

누군가의 전 생애가 불이 되고 물이 되어가는 곳에

발톱과 초점이 나의 전부일 뿐

 

땀에 젖은 모자가 세 번 원을 그릴 때

튕기듯, 붉은 언덕으로

 

 

*시집/ 어떤 사람이 물가에 집을 지을까/ 문학동네

 

 

 

 

 

 

장갑 - 강신애


무덤에 바칠
꽃 한송이 가져오지 않았다니

장갑 한 짝이라도 두고 올까
망설이던 사람

석회맛 나는 포도주
영롱한 호수와 알프스가 가까운
보르헤스가 첫 시를 쓰고 최후로 묻힌
도시의 공원묘원이었지

돌아와 보니 없다
오토바이용 가죽장갑 한 짝

단순한 묘석에서
개똥지빠귀가 깡충거리는 사이 흘렸을까

달리는 기차에서 떨어진 장갑을 향해
한쪽을 마저 벗어던졌다는
열차 바퀴 소리처럼 감미로운 이야기도 있지

어떤 책이든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없던
살아 육체의 감옥에 갇히고도 쉴 틈이 없던 보르헤스는
또 하나의 도서관
무덤에서 꾸던 꿈 이어서 꾸고 있겠지

황금빛 마리골드 꽃길로 돌진하던 여름 햇살과
상쾌한 속력을 전해주고 싶었을
파란 장갑 하나

여담(餘談)처럼

눈먼 우상의 묘석
어디쯤 떨어져 있겠지

 

 


# 강신애 시인은 경기 강화 출생으로 1996년 <문학사상>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서랍이 있는 두 겹의 방>, <불타는 기린>, <당신을 꺼내도 되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물가에 집을 지을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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