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내가 앉았던 자리에 대한 예의 - 최세라

마루안 2021. 5. 26. 22:30

 

 

내가 앉았던 자리에 대한 예의 - 최세라


플라스틱 의자 네 개가 무릎을 붙이고 앉아 국화꽃 화분을 내려다 본다
오월이라서 무성한 잎사귀만 있고
아치형 철제기둥엔 녹꽃이 너댓 무더기 피어있다

아무것도 미동하지 않았다 수면은 손바닥으로 깎아낸 한 됫박의 곡식 같았다 바람도 스치지 않았고 그림자도 없었다 물은 물인 채 부풀고자 했으나 아직은 아니었다

녹슨 함석 담장 옆으로 모래가 쌓여 있었다
첫삽을 뜬다면 얼마만큼 파일까

사람이 서 있는 자리마다 길이 갈라지고 있었다

줄일 수 있는 데까지 볼륨을 낮추며

내가 앉았던 자리를 위해 오늘은 아무도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시집/ 단 하나의 장면을 위해/ 시와반시

 

 

 

 

 

손끝 - 최세라


엉겅퀴 피는 계절이면 보랏빛 입술 바르고 건천에 엎드리고 싶다
가뭄이 할퀴고 간 미소와 마주치고 싶다

독한 설거지물에 손끝이 갈라지던 너는
어두운 복도를 숨죽여 걷다
바늘 쌈지를 삼키고 죽은 유령을 만났다고 말했다

언젠가
어두운 창문 곁에서 발꿈치를 들 때면
누군가 따라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울먹이던 너를
멀리서 보고만 있었던 일이
두고두고
모래주머니로 명치에 얹히는 것은

지금 내게서 목 쉰 새의 울음이 흘러나오는 이유
네가 접시처럼 웃었다고
흠 없고 무결한 흰 접시처럼 네가 좀 웃었다고
엉겅퀴가 영영 찾아오지 않을 줄 알았던

착각이 여름 가뭄을 부르고
내 육신과 마른 천변을 재보랏빛 군락으로 두르고

아직 산패되지 않은 육신은 손톱 밑의 살 뿐이어서

엉겅퀴 피는 계절이면
갈라진 너의 손가락에 보랏빛 내 손끝을 보태고 싶다


 


# 최세라 시인은 1973년 서울 출생으로 2011년 <시와반시>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복화술사의 거리>, <단 하나의 장면을 위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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