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흔들리며 고맙다고 - 김형로

흔들리며 고맙다고 - 김형로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몸 몸의 주름이 펴지지 않는다 굽은 곳은 더 틀어지고 패인 곳은 더 깊어졌다 아픈 몸을 자주 미워했지만 몸은 나를 사랑하기만 했다 비극은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사실 티격태격 도니 말 없던 몸이 말을 한다 귀에서 여치 소리 나고 눈에는 벌레가 난다고 무릎은 녹슨 돌쩌귀 되었다고 밤마다 몸에게 묻는다 오늘 하루 어떠셨냐 손으로 만지며 쓰다듬는다 몸이 답한다 힘닿는 데까지 가 보겠다고, 숨소리가 많이 얕아졌다 함부로 부렸구나 다음 생이 있거든 내가 몸이 될 테니 너는 내가 되거라 결기 없고 시류도 못 맞추는 내가 한쪽 쳐진 몸과 함께 오늘도 어제처럼 간다 절뚝절뚝 흔들리며 고맙다고 힘들면 잡고 서서 높다란 새를 함께 보면서 *시집/ 백 년쯤 홀로 눈에 묻..

한줄 詩 2021.05.31

서성이다 - 박형욱

서성이다 - 박형욱 산중 고찰 경내에 머무는 나무는 고목이 되고 산비탈 계곡 따라 떠나는 물은 바다에 닿는다 한자리에 오래 머문다는 것과 쉼 없이 멀리 흐른다는 것은 모두 지극한 합장 언제던가 죽을 만큼 치열해본 적이 생의 절반 머물지도 떠나지도 못해 절집 마당 서성이는 그림자가 있다 *시집/ 이름을 달고 사는 것들의 슬픔/ 도서출판 지혜 남은 이력(履歷) - 박형욱 벽시계가 어느 날 멈췄다 건전지를 갈아 끼우면서 인간 수명도 건전지 같다는 생각에 살아온 이력을 더듬어 본다 십대에는 축구만 했다 이십대에는 이데올로기 과식에 소화불량을 달고 살았다 나머지 이십 년은 산 속을 네 발로 기어다녔다 복기해볼수록 심장을 때리는 맥박 시계불알처럼 살기 위하여 가불까지 했다니 어디쯤 달렸는지 모르고 사는 건전지 위치..

한줄 詩 2021.05.30

다음 생까지는 멀고 - 김윤배

다음 생까지는 멀고 - 김윤배 왜 흰 회벽으로 된 방에 유폐되어 있는지 천천히 하얀 회벽을 둘러보거나 낡은 서간집의 표지를 들여다보거나 부장품, 레벡의 네 현을 튕겨보거나 Time to say goodbye를 허밍으로 노래하거나 여러 개의 촛불을 창틀에 올려놓거나 실루엣이 하얀 회벽에 유령처럼 일렁인다 젖은 눈을 감았다 뜨면 밤이고 다시 감았다 뜨면 낮이다 밤과 낮이 눈동자 안에 있다 창틀의 촛불이 꺼지기 시작한다 황홀한 착란의 시절은 스치듯 지나갔다 유폐는 선택이었다, 밤은 며칠씩 계속되었으니 잠시 행복했고, 늘 얼어 있는 입술로 불행했다 얼어 있는 입술을 이 생에서 녹일 수 없다 다음 생까지는 멀고 *시집/ 언약, 아름다웠다/ 현대시학사 청춘 - 김윤배 숲속의 야생화는 아직 지려고 하지 않았는데 마음..

한줄 詩 2021.05.30

미지의 나날 - 윤석정

미지의 나날 - 윤석정 나이를 들어도 비슷비슷한 나날들의 미묘한 차이를 몰라 나는 차이에서 막막하고 나날에서 막연하다 나날들의 이름에 얼굴이 있을 텐데 내가 알 수 없는 얼굴들은 어둡다 휴대 전화의 이름을 들여다보다가 그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아도 동명이인의 얼굴들이 마구 겹쳐도 혹여 그가 최초의 내 얼굴을 이미 삭제했더라도 나는 알 수 없는 얼굴들의 이름을 지울 수 없다 그의 이름은 미지이므로 때때로 해묵은 일기장 속의 얼굴들이 영영 다다를 수 없는 미지의 저편처럼 점점이 어두워지고 내가 관통했던 시공의 얼굴들은 검정으로 변했으므로 하여 내게 미지의 나날은 검정 미지의 이름은 최초의 어둠 영혼은 투명 나의 얼굴에 영혼이 담겨 나의 이름도 투명이어야 될 텐데 나이가 들수록 최초의 얼굴들은 밥 먹듯 나날을 ..

한줄 詩 2021.05.29

나는 울지 않는 바람이다 - 천양희

나는 울지 않는 바람이다 - 천양희 마음 끝이 벼랑이거나 하루가 지루할 때마다 바람이라도 한바탕 쏟아지기를 바랄 때가 있다 자기만의 지붕을 갖고 싶어서 우산을 만들었다는 사람을 떠올릴 때마다 후박잎을 우산처럼 쓰고 비바람 속을 걸어가던 네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별명이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 랭보를 생각할 때마다 바람은 그리워하는 마음들이 서로 부르며 손짓하는 것이라던 절절한 구절을 옮겨 적고 싶을 때가 있다 나는 울지 않는 바람이라고 다른 얼굴을 할 때마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던 죽은 시인의 시를 중얼거릴 때가 있다 여러 번 내가 나를 얻지 못해 바람을 맞을 때마다 바람 속에 얼굴을 묻고 오래 일어나지 못할 때가 있다 이 세상 어디에 꽃처럼 피우는 바람이 있다면 바람에도 방향이 있고 그 속..

한줄 詩 2021.05.29

도반(道伴) - 이상국

도반(道伴) - 이상국 비는 오다 그치고 가을이 나그네처럼 지나간다. ​ 나도 한때는 시냇물처럼 바빴으나 누구에게서 문자 한 통 없는 날 조금은 세상에게 삐친 나를 데리고 동네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사준다. ​ 양파 접시 옆에 춘장을 앉혀놓고 저나 나나 이만한 게 어디냐고 무덤덤하게 마주 앉는다. ​ 그리운 것들은 멀리 있고 밥보다는 다른 것에 끌리는 날 ​ 그래도 나에게는 내가 있어 동네 중국집에 데리고 가 짜장면을 시켜준다. *시집/ 저물어도 돌아갈 줄 모르는 사람/ 창비 누이 생각 - 이상국 -동요 에 기대어 누이라는 말 그립다 무정한 나의 어머니는 아들 삼형제만 낳아서 오빠라는 말 한번 듣지 못하고 여기까지 왔지만 뜸북새 울면 눈이 퉁퉁 부어 서울 간 오빠 기다리던 누이들은 다 어디 갔나. 없는 집..

한줄 詩 2021.05.28

새가 날아간 후 - 박주하

새가 날아간 후 - 박주하 저 나무 겨드랑이에서 다투며 피었던 꽃들 모두 날아간 뒤 나무는 혼자 무슨 생각을 하나 어깨가 휘도록 무성했던 잎 지고 난 뒤 이리로 오라던 간절한 손짓 내려놓고 나무는 날마다 무슨 생각을 하나 재잘거리던 씨앗들 박수를 치며 웃던 잎사귀들 다 떠나보낸 뒤 비우고 비운 마음속에는 또 무엇이 들어오나 말하지 않아도 굳은 다짐이 있었나 아무도 모르게 번진 약속들이 있었나 서쪽 하늘이 붉게 타오르자 누군가는 지구의 끝이라 말하고 가지 끝에 앉았다 날아오르는 새는 그것을 시작이라 말한다 *시집/ 없는 꿈을 꾸지 않으려고/ 걷는사람 오월의 사람에게 - 박주하 -노무현 못다 한 말 품고 한 번만 다녀가세요 비가 오지 않아도 비가 너무 많이 내려도 꼭 한 번만 다녀가세요 할 말이 많아서 오는..

한줄 詩 2021.05.28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 손병걸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 손병걸 고운 꽃잎에 베인 허공이 파르르 떨고 있는 모습을 한참 동안 들여다본 적이 있다 그날부터 나는 걸음을 가만가만 내디뎠고 키가 큰 나뭇가지에 찔린 먹구름 속에서 소리 없이 내리는 빗물 한 방울도 예사롭지 않았다 나는 그만큼 길 위에서 자주 젖었고 굵고 긴 빗줄기가 멈춘 뒤에도 한여름 뙤약볕 속을 길게 걸었다 언젠가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한 것 같은 그늘 숲속 나무 밑동 아래에서 바싹 마른 풀잎 한 가닥이 차지했을 허공이 또다시 풀잎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동안에도 나는 주저 없이 되돌아 걸어야 했다 넓어진 보폭만큼 내 몸이 빠르게 자라며 음파음파 패인 허공의 신음이 바람 소리라는 것을 알게 될 때쯤 나는 겨우 둥글게 잠들기 시작했다 스스로 몸을 말며 작아지는 것들은 허공의 ..

한줄 詩 2021.05.28

우물에 대한 기억 - 최준

우물에 대한 기억 - 최준 계산속으로는 하루에 하루를 더하면 이틀이 맞다 맞지만 두레박에서 부엌까지 여름에서 다시 여름까지 하늘을 이고 물동이가 오간 거리는 별들이나 읽을 수 있던 시간 할머니 적 얘기다 우물 안 개구리가 구름 위로 팔짝 뛰어오르기도 하고 버드나무 화살촉 하나가 그 어두운 구멍을 향해 잘못 쏘아지기도 하고 넘칠 일 없는 함박눈이 둥근 적요를 메워보려고 무리하게 겨울을 온통 겨울로 안간힘 쓸 때도 무릎 한 번 출렁이지 않고 그냥 버텼을 거다 할머니 돌아가신 지 삼십 년 뒤란 장독대를 반짝여주던 북극성을 묻어버리고 버드나무 밑동을 잘라 마지막 아궁이에 불을 지피던 저녁 남몰래 지워진 길이 하나 있었을 거다 아무도 만져주지 않았던 시간이 저 홀로 먼 길을 가고 있었을 거다 눈물 흘러넘치면서 먼..

한줄 詩 2021.05.27

물의 저녁 - 손남숙

물의 저녁 - 손남숙 물결이 나무의 한 생애를 주름으로 집적하여 기화된다 올라와 한때 푸르렀던 시간 기억은 가지를 들고 사라지는 한 잎 늦가을 스산한 바람을 타고 흔들리는 잎들의 커다란 환전 깊은 고요와 심해의 물고기와 같은 호흡이 굽이쳐 어쩌면 잎잎이 저렇게 버적거리나 생애의 달콤한 먼지는 늘어질 수밖에 없지, 쌓이므로 연거푸 날아가는 새들이 부르짖는 세계 아른거리는 노래의 후렴구는 만삭의 흩날림과도 같고 그 모든 것들을 붉게 연주하는 계절을 잊었네 해마다 되비쳐 오는 상처를 물에 앉히면 슬금슬금 돋아 나오는 물의 무늬 어스름 저녁의 과오와 같은 물결 *시집/ 새는 왜 내 입안에 집을 짓는 걸까/ 걷는사람 찰칵 - 손남숙 세 시간 동안 앉아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까지 세 시간이나 내가 안 것은 ..

한줄 詩 2021.0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