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현수막의 궁금증 - 고태관

현수막의 궁금증 - 고태관 언제 다 마를까 비에 젖은 글자가 비스듬하게 번진다 소액대출이자없는행복을붙잡으세요 하루에 한 마디씩 매달 수 있다면 스스로 내걸리는 사람도 있겠지 침묵이 되어 하루에 하나씩 묶인 줄을 풀어낸다면 되돌리고 싶은 고해성사 같을까 후회처럼 아무도 잠들지 못하는 밤 사람들은 잠든 나를 구경하러 오겠지 모두가 잠든 밤에 부스스 깨어난 나는 사람들의 헝클어진 이불을 덮어 주러 다닐 거야 하루에 한 명씩 죽어야 한다면 다음 날 한 명씩 살릴 수 있다면 어제 죽은 내가 오늘 살아날 수 있을까 기회의땅으로아메리칸드림미국워킹홀리데이 떠난 사람은 내 차례가 왔다고 기뻐할까 도착한 곳에서 먼저 떠나온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돌아온 사람은 보고 싶은 사람을 찾지만 떠나고 없다 길을 나선 사람과 돌아오..

한줄 詩 2021.06.21

눈물이 나오는 순서 - 김태완

눈물이 나오는 순서 - 김태완 늙은 엄니가 운다 늙은 엄니 고개 떨구고 온몸을 바닥에 내려놓고 숨죽여 운다 엄니는 늘 그렇게 울었다 슬프고 절망스러울 때, 해주고 싶어도 해줄 수 없을 때, 믿었던 내가 엄니 가슴에 못질했을 때, 내가 알고 있는 엄니는 늘 그런 모습으로 주저앉아 모든 슬픔을 엄니 탓으로 만들었다 늙은 엄니가 나 땜에 운다 어릴 적 보아왔던 그 모습으로 숨죽여 운다 이제는 다 큰 자식 놈 눈치보며 성치 않은 몸 예전보다 더 크게 내려놓고 작은 체구 녹아내린 눈사람처럼 온몸의 상처를 끌어안고 엄니가 운다 늙은 엄니가 흘리는 눈물이 주름을 타고 덜컹거리며 바닥에 떨어진다 늙은 엄니는 나 땜에 울고 나는 아직도 나 땜에 운다 내가 나 땜에 우는 동안 엄니는 남 같은 자식 위해 조심스레 달구어진 ..

한줄 詩 2021.06.21

코로나 평등 - 최영미

코로나 평등 - 최영미 외로운 사람은 더 외로워지고 부자들은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이들은 죽음에 내몰리고 바쁜 사람들은 더 바빠지고 한가한 사람은 지루해 미칠 것 같은 저녁 저희 세상을 만난 새들이 부지런히 펄럭이는데 내 속에 노래는 오래전에 죽었다 너를 보낸 뒤 봄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손톱이 자라는 것도 모르고 거울도 보지 않았지 후회로 막힌 구멍을 뚫고 양치물을 내리면 이를 세 번 닦으면 하루가 갔다 건너편 아파트에 불이 켜지고 저녁상을 차리느라 누군가를 기다리며 켜지는 습관 행복한 사람들은 뭘 해도 행복하다 *시집/ 공항철도/ 이미출판사 어떤 죽음 - 최영미 ​ 너의 창문을 푸르게 물들인 활엽수의 이름을 너는 알려고 하지 않지 그 나무와 저 나무의 잎사귀가 어떻게 다른지 구별하지도 못하지 너의 ..

한줄 詩 2021.06.20

뿌리 독한 한 송이 꽃 - 정기복

뿌리 독한 한 송이 꽃 - 정기복 열다섯 이후 불러보지 못한 아버지 황토밭머리 삭은 수숫대로 누운 채 흙살 풀리는 이른 봄이면 뼈마디 뒤척여 한 송이 꽃 스무 해나 피워 올린다 살 썩히고도 다 하지 못한 사모(思母)의 정이 저리도 뼈저리게 고개 숙인 자줏빛일까 식솔 다 거두지 못한 미련이 이리도 시린 향기일까 죽음을 먹고 자라 살아 있음의 통증을 확인시키는 맨 처음 지상의 슬픈 일 나를 세상에 있게 한 저 빛깔 보노라면 울렁이는 황토, 울렁이는 하늘 가슴마저 울렁이게 하는 꽃의 떨림, 꽃의 분출 살아 모진 바람이었던 아버지 뿌리 독한 꽃 한 송이 뽀-옥 피워 올린다 할미꽃, 몇 광년, 어느 행성에서 온 별똥별이면 나 꽃 피워 올릴 수 있을까? *시집/ 어떤 청혼/ 실천문학사 모란공원, 여름 - 정기복 풀..

한줄 詩 2021.06.20

새의 감정 - 김유미

새의 감정 - 김유미 할머니와 둘이 사는 것은 슬펐다 내 속에 누군가 버린 새가 살고 있다 숨을 쉬기 위해 영화관엘 갔고 가칭 투명이라고 했고 그날의 새는 불투명해서 날아가 버렸다 사람들은 모르는 눈치였지만 팝콘을 주고받은 아르바이트 언니는 눈동자가 그렇게 우울해도 되겠어? 라며 흰 구름을 권유했다 영화를 뒤집어 새를 불러냈다 허공의 줄거리에 초점을 맞추고 다시 얻은 새에게 흰 구름을 떠먹이는데 노랗게 물들인 내 머리카락이 자랐다 주머니 속 내 영혼을 만지작거리면 캐러멜처럼 끈적이는 손바닥 할머니 곁에서 꿈이라고 애교 떨고 화분 곁에서 예쁘지 예쁘지 속삭이다가 내 곁에서 거품이라고 풀이 죽기도 했다 벼랑을 다른 이름으로 바꾼다면 굳어 버린 날개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할머니 안 들리는 척 창밖으로 새를 날..

한줄 詩 2021.06.19

저녁의 후회 - 박주하

저녁의 후회 - 박주하 ​ 꽃을 사랑한다면 끔찍한 마음은 그 꽃 밑에 누워야 할 일 그러나 이미 살구꽃 핀 저녁들을 후회하던 참, 골목마다 헐값으로 꿈을 밀어 넣고 나자 모든 것이 사소하고 충분했으며 비에 젖을수록 맨발이 딱딱해진다 위로는 습관이기에 슬그머니 손을 놓고 돌아서지만 물 깊어 건너지 못하는 다리는 결코 당신의 불운이 아니다 마음을 다쳐 몸 안에 갇혔으니 입 벌린 고요에서는 죽음의 냄새가 난다 캄캄하고 작아진 마음들이 밀려드는 저녁 어둠을 핑계 삼아 질기게 불안을 껴안으니 불행을 너무 쉽게 불태우고 난 기분, 소리 없이 혼자 뜨거워진 심장을 버리고 흰 새가 떠나간다 *시집/ 없는 꿈을 꾸지 않으려고/ 걷는사람 불가피한 저녁 - 박주하 변심의 기미를 읽고 울컥 몸이 상해 버렸지 절반의 슬픔과 절..

한줄 詩 2021.06.19

아날로그는 슬픔의 방식을 눈물로 바꾸는 거예요 - 이기영

아날로그는 슬픔의 방식을 눈물로 바꾸는 거예요 - 이기영 흐느낌과 어깨의 떨림을 돋보기처럼 볼록하게 터질 듯 위험수위를 견디는 눈물은. 서툰 방향 사이에서 끊임없이 점멸하는 신호등을 건너 마침내 굳게 선 결심을 따라가는 눈물은, 좋은데이를 몇 번이나 지나야 쓸쓸한 위장을 모두 속일 수 있는지 내게 주어진 슬픔만큼만 탕진하고 나면 까마득하게 사라지는지 명랑하게 잊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온 힘을 들여 밀어내는데도 계속해서 또 다른 감정이 생겨나는 표정 속에 뒤섞이고 마는 이 완벽한 한 방울의 통증, 아, 무섭도록 일반적이다 *시집/ 나는 어제처럼 말하고 너는 내일처럼 묻지/ 걷는사람 유월의 숲 - 이기영 너무 멀어 몸을 던질 수조차 없던 시퍼런 바닷물 속에 서둘러 반짝거리고 알아서 일렁이던 눈빛이 있었..

한줄 詩 2021.06.16

슬픔을 줄이는 방법 - 천양희

슬픔을 줄이는 방법 - 천양희 빛의 산란으로 무지개가 생긴다면 사람들은 자기만의 무지개를 보기 위해 비를 맞는 것일까 빗속에 멈춰 있는 기차처럼 슬퍼 보이는 것은 없다고 까닭 모를 괴로움이 가장 큰 고통이라고 시인 몇은 말하지만 모르는 소리 마라 오죽하면 슬픔을 줄이는 방법으로 첫째인 것은 비 맞는 일이라고 나는 말할까 젖는 일보다 더 외로운 형벌은 없어서 눈이 녹으면 비가 되는 것이라던 선배의 말이 오늘은 옳았다 빗소리에 몸을 기댄 채 오늘 밤 나는 울 수 있다 전력으로 *시집/ 지독히 다행한/ 창비 견디다 - 천양희 ​ 울대가 없어 울지 못하는 황새와 눈이 늘 젖어 있어 따로 울지 않는 낙타와 일생에 단 한번 울다 죽는 가시나무새와 백년에 단 한번 꽃 피우는 용설란과 한 꽃대에 삼천 송이 꽃을 피우다..

한줄 詩 2021.06.15

파리를 가지 못한 젊은이의 몽정 - 정경훈

파리를 가지 못한 젊은이의 몽정 - 정경훈 울고 싶을 때가 있다 보도블록을 걷다가 엊그제 구두를 밟고 지나간 말라뮤트가 생각나서 괜히 울컥할 때가 있다 욕봤다 왜 하필 전봇대를 차 본다 있는 힘껏 디딤 발을 딛고 없는 힘껏 공을 상상한다 파리의 한옥과 도시의 몰락 가지 말자고 하면 가지 않았을 텐데 못 간다고 하면 너네들 죽여 패서라도 가야겠다는 태생의 객기 아, 나는 얼마나 많은 노래를 부르며 축구를 했던가 그라운드를 뛰어다닐 때 그리고 부조리가 끝난 후에 가시나를 위하여 바친 러브송은 몇 명의 귓밥을 휘둘렀는가 그 노래방 그 단칸방과 그 냉장고 그 매실과 그 목마름 밤과 달빛에 비치는 그이의 목젖 습관처럼 헤어져도 버릇이 들어 왕래하게 되는 이성의 항구 나는 많이도 버렸다 인사는 각별하게 하지만요 둘..

한줄 詩 2021.06.12

나에게 묻는다 - 이산하

나에게 묻는다 - 이산하 꽃이 대충 피더냐. 이 세상에 대충 피는 꽃은 하나도 없다. 꽃이 소리 내며 피더냐. 이 세상에 시끄러운 꽃은 하나도 없다. 꽃이 어떻게 생겼더냐. 이 세상에 똑같은 꽃은 하나도 없다. 꽃이 모두 아름답더냐. 이 세상에 아프지 않은 꽃은 하나도 없다. 그 꽃들이 언제 피고 지더냐. 이 세상의 모든 꽃은 언제나 최초로 피고 최후로 진다. *시집/ 악의 평범성/ 창비 마당을 쓸며 - 이산하 옛날 할아버지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마당부터 쓸었다. 매일 쓸지만 어느새 또 어지럽다. 오랜만에 집 청소를 한다. 잠시 두 가지 방법을 놓고 고민한다. 빗자루로 쓰레기를 밖으로 밀어내는 것과 진공청소기로 쓰레기를 안으로 빨아들이는 것이었다. 먼저 밖으로 배척하는 것은 오랜 시간 빗자루만 자꾸 닳고 ..

한줄 詩 2021.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