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바다 - 이규리

바다 - 이규리 새벽빛을 오래 바라보다가 볶은 콩 네 알을 씹으며 속쓰림을 달랬다 우리는 아침을 함께 본 적이 없다 데려오지 못하는 아침에게 질문하는 대신 나는 답을 줄여나간다 내가 원하는 날짜가 이 생엔 없을 것 새벽빛은 보라와 실어와 분홍의 순서였고 마음은 적요와 파랑과 고립의 순이었다 배들이 떠 있을 뿐 나아가지 않는 평면을 종일 바라보았다 그런 것 적막이야 나의 말도 두 개의 흔들림과 두 번의 수평 흔들리지 않는 배들은 고통이 아래에 있을까 마음은 무엇입니까 어린 사람이 큰 사람에게 물었다는데 갈 때는 보이는 쪽, 올 때는 어두운 쪽 모르긴 해도 누구나 흔들리고 있었을 것 잘하려던 아침은 울곤 하여 잘하지 않는 편을 택하는 마음이 나을 것이다 내가 점점 사소한 일이 되었다는 걸 잊었다 해도 *시집..

한줄 詩 2021.06.11

지구로 달려온 떨림 - 김익진

지구로 달려온 떨림 - 김익진 그를 인용하지 말라 차가운 어둠 속의 불일 뿐이다 허허망망 달리다 보니 네가 본 화염이다 그를 평범한 시선으로 보아라 그는 어느 창문에도 얼룩을 남기지 않는다 웅크리다 직교하는 빛일 뿐이다 그는 진원지에서 뜨거웠다 차가움의 극한을 뚫고 지구로 달려온 떨림이다 어둠이 전부일 때부터 그 없이는 아무 날도 없었다 그는 세상보다 빨라 언제나 어디서나 혼자였다 너희는 모두 그로부터 왔다 모든 기술도 그로 이루어졌다 그에게는 신화 같은 수백억 광년이 있다 그 세월이 있어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분다 그 없이는 아무 날도 없다 *시집/ 사람의 만남으로 하늘엔 구멍이 나고/ 천년의시작 우주의 격자 - 김익진 우주의 장엄함 속에 우리의 삶은 미미하고 순간적이다 별빛 아래 숨겨진 각자의 비밀들 ..

한줄 詩 2021.06.10

풍경 속에 나를 넣는다 - 피재현

풍경 속에 나를 넣는다 - 피재현 허청허청 문상 다녀오셔서 큰 마루에 대자로 누우시던 조부님 양은 주전자 들고 불알도 덜 영근 내가 밭둑길 걸어 퍼 나르던 조부님 막걸리 연고도 없는 저승에서는 누가 나 대신 술심부름 할까 옛 풍경 속에 나를 넣는다 몇몇 우화들을 함께 넣는다 세월이 흐른다는 것은, 이를테면 잊어버린 것들에 대한 안부를 묻는 것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일 이를테면, 십수 년 만에 돌아 온 큰누나의 분 냄새 같은 것, 낯선 사내에게 '매형'이라고 처음 불러보던 이상한 기표(記表) 한 번도 주인공인 적 없었던 풍경 속에서 나를 빼내 온다 내가 없는 풍경 속에서 도화(桃花) 진다 할아버지 돌아가신다 *시집, 우는 시간, 애지출판 부고 - 피재현 문상 가서 허기를 용서하는 데 오래..

한줄 詩 2021.06.09

타인의 삶 - 오두섭

타인의 삶 - 오두섭 불 꺼진 날이 왜 많은지, 알려고 하지 않은 창가의 밤 서쪽 외벽을 타고 온 해가 모서리로 떨어지면서 짙은 그림자를 남기며 나뭇가지들이 그곳을 기웃거리는 그때 저 창이 오늘은 왜 열려 있는지, 어쩌다가 무심코 열려서 나와 눈이 마주칠 뻔한 풍경의 계단 아래로 슬그머니 내려가서 올려다 보면 혼자 레몬 즙을 짜고 있거나, 시집의 한 쪽을 반복해서 읽고 있거나, 그러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거나, 남자가 먹을 음식을 만들고 있을지도, 둘이 함께할 날들에 관해 심각한 담화를 나누고 있는 중인지도, 갑자기 외출을 서두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림을 그려보는 것이다 내 화풍은 사실화에 닮아 있지만 도대체 옷을 벗지 않는 피사체들 힐끗 눈 흘겨보는 그이의 우편함 희미한 불빛에 묻어 나오는 정체 모를 소리..

한줄 詩 2021.06.08

내 안에 봉인된 삶이 있다 - 박남준

내 안에 봉인된 삶이 있다 - 박남준 마당 앞 울타리 위 죽은 매화나무와 때죽나무 긴 그늘을 베어 세운 작은 솟대 새의 몸이었던 푸른 나이를 기억하므로 노래에 가닿을 수 있을까 누군가를 바라본다는 것 그의 사랑과 죽음 슬픔과 기쁨 또한 몸에 들여놓는 것이리 내 안에 봉인된 전생이 있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겠다 내가 새의 이전을 알고 있듯이 *시집/ 어린 왕자로부터 새드 무비/ 걷는사람 말뚝과 반란 - 박남준 고정되어 있는 운명이 있다 누군가 다가와 그의 목에 닻줄을 매고 묶어 놓기를 기다리는 그렇게 해야만 목숨이 완성된다고 생각하는 바닷가 움직일 수 없는 말뚝 너머 물이 들고 물이 난다 닻줄의 시선으로 눈어림을 적신다 한 번쯤 저 말뚝 송두리째 해일을 꿈꾸었을까 세상의 어느 바닷가 포구에 흔한 말뚝이 외..

한줄 詩 2021.06.07

안개의 취향 - 정선희

안개의 취향 - 정선희 앞이 보이지 않는다 안개 때문이야, 당신은 실망한 듯 말했고 먼 곳이 더 잘 보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말했다 나의 체온이 당신의 지표면보다 차가운 경우 물방울이 당신의 심중 어딘가에 맺혀 시야가 흐릿해지는 현상 나와 당신 관계 그런 말은 몰라도 좋아 나를 낯선 곳으로 데려가서 조금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는 영혼의 매개체, 뭐 그런 말도 말고 내가 배롱나무에 붉은 전세를 들거나 이런 말이 이해가 되는 편이지 알고 있지만 모르는 이야기 나는 좀 모호한 것들이 좋아 내가 꽃이나 나비가 되기도 하고 안은 밖이 되기도 하는 무엇보다도 안개 때문에 나는 통유리인 당신을 넘기도 하고 지우기도 하고 *시집/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많았다/ 상상인 환상통 - 정선희 그는 낮게 풀처럼 앉아 기타를..

한줄 詩 2021.06.03

우리는 서로에게 낱장으로 기억되고 - 박순호

우리는 서로에게 낱장으로 기억되고 - 박순호 ​ 몇 장 남지 않은 달력과 며칠이면 완성된다는 말 당신은 캄캄한 골목을 오가며 끼어들다 지치고 비공식적인 만남을 주선하듯 그 자리를 빙그르르 맴돈다 바람에 그을린 생각들도 낱장으로 뜯겨져 나간다 문득 눈이 부셨고 불 냄새를 맡았다 타다 남은 조각들을 누가 맞출 수 있는가 그을음 속에서 채굴되는 무늬를 누가 설명할 수 있는가 다시 한 번 말해두지만 나는 밀실처럼 어둡다 그리고 고통스럽기 짝이 없다 불탄 자리 곳곳에서 쐐기 모양의 흔적이 발견되지만 뚜렷한 정의를 내릴 수 없다 거룩한 일상에 참여했던 계절은 사그라졌어도 나의 전체가 반으로 뭉개졌어도 저편의 들여다볼 수 있게끔 구름다리를 놓아줄 텐가 밥보다 더 소중한 것을 내어줄 텐가 내게 명자꽃처럼 와줄 텐가 언..

한줄 詩 2021.06.02

길 위의 잠 - 전인식

길 위의 잠 - 전인식 밤이면 내 몸은 동그랗게 말린다 마른 몸에 찾아들기 좋아하는 찬바람을 그리운 사람으로 껴안고 아무렇게나 드러눕는다 내 몸 보기 흉하고 망측스러워도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잠을 자는 나 꿈속에선 아흔아홉 칸 영혼의 집을 짓기도 한다 그 옛날 사람들 마음의 열반을 위해 산천을 떠돌았듯 가는 곳이 길이고 눕는 곳이 집인 이 도시 기슭 무량무량 떠돌기로 마음을 바꾸고 나니 하늘 푸르고 햇살 눈부시다 집 걱정에 자식 걱정 근심 많은 사람들 금리와 주식에 예민한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아무렇게나 먹고 자는 삶의 즐거움을 가지는 것보다 비우는 것이 어렵다는 열반은 오로지 몸 똥아리 하나로만 이룰 수 있는 것 *시집/ 검은 해를 보았네/ 불교문예 호박꽃에는 - 전인식 꽃 피우고 열매 맺으며 한 철 ..

한줄 詩 2021.06.01

이불 무덤 - 천수호

이불 무덤 - 천수호 우리집 이불 속 역사는 약사(略史)로만 전해진다 저 속에서 얼마나 자주 아이를 잉태했는지도 저걸 덮고 큰언니가 죽어나간 일도 어디에도 기록은 없다 간단한 엄마의 말로 요약되어 가끔 끙, 하는 신음에만 묻어나올 뿐 완전한 진실은 다 묻혔다 어린 내 발등에 차인 아버지 밥그릇이 두어 번 발라당 넘어졌어도 아버지는 묵묵히 머리카락을 떼고 밥그릇을 다 비우셨고 스테인리스 밥그릇의 절절 끓는 온기가 내 발끝을 자주 녹였다는 것도 묵인된 역사였다 누구 발등인지 모를 매끈한 살결에 은근히 발을 잇대기도 했고 그 촉감만큼 매끄러운 눈물도 이불 속에서는 잘 묻혔다 부화된 아이들은 무럭무럭 그 이불 속에서 자랐고 이불 속으로 도저히 두 발을 숨길 수 없을 때는 하나씩 집을 떠나갔다 하얀 목화솜이 따글..

한줄 詩 2021.06.01

견고한 낙화 - 손석호

견고한 낙화 - 손석호 ​ 감꽃 지던 마당에서 엄마 되는 게 꿈이던 오월의 아이는 청보리밭 두렁에서 파랗게 흔들렸다 소꿉놀이 밥상에 감꽃 밥을 차려 놓고 쓰러진 보리처럼 수상한 황변이 왔다 아파 보였지만 소리 내어 울지 않고 엄마처럼 눈빛으로 우는 걸 흉내 내고 있었다 늦은 봄비 소란스러운 밤 비 갠 마당에 찍힌 의문스러운 발자국에 빗물이 가득 고였고 감꽃이 흥건했다 대문 밖 청보리밭을 바라보는 동안 툭 툭, 양철 지붕에서 들리는 빗소리 처마로 떨어진 감꽃이 도르르 눈앞으로 굴러온다 모든 꽃이 낱장 꽃잎으로 부서져 날아갈 때 감꽃은 온몸으로 지고 오래 참은 비꽃처럼 무겁다 해마다 아이는 감꽃처럼 견고하게 오고 내 안의 얇은 지붕을 밤새 두드린다 오월의 밤은 꿸 것이 많고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다 *시집/ ..

한줄 詩 2021.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