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연기의 지점 - 김유미

연기의 지점 - 김유미 서쪽이 몰려와 저녁을 지피고 있었다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았을 때, 두 눈에서 켜지던 세계 팔을 휘저으면 고인 흐느낌들이 발목도 없이 걸어 나왔다 누가 사는 몸이었나? 겨울이 두 살을 밀어 올렸고 손가락 사이에서 나무가 자라나 바람을 흔들다 떨어뜨리곤 했다 한 발짝 두 발짝 유목의 길에서 만난 생의 난간 그 위에서 나를 부축하던 질서들 살들이 외로워서 흘릴 게 많아졌다 왼쪽 눈을 감으면 오른쪽 눈이 아팠다 찌익 늘어나는 솜사탕도 있고 쑥쑥 깊어지는 울음도 있다 부력의 날들이 공중으로 부양되었다 어디까지 갔니? 여기까지 왔다 발자국이 번지는 소리가 되어 해 질 녘까지 치솟는 그네 *시집/ 창문을 닦으면 다시 생겨나는 구름처럼/ 파란출판 음복 - 김유미 당신은 짧은 인사말의 문..

한줄 詩 2021.05.15

두 번째와 첫 번째 사이 - 정경훈

두 번째와 첫 번째 사이 - 정경훈 두 다리 멀쩡한 것이 성에 차지 않았으니 모쪼록 발품을 팔아 새가 되었습니다 당신에게로 도달할 수 있는 지형이 평안해졌다는 것입니다 줄자를 길게 늘어뜨려 수평을 만들고 칠석의 달이 차오르면 견우와 직녀가 남기고 간 오작교가 떠오릅니다 깃털의 결을 다듬고 부리를 닦으며 매무새를 정돈해봅니다 당신을 견주니 당신도 모르게 보이는 당신의 자태 파동으로 인해 부서지는 나의 심장 그 안의 호수 이성의 박멸 이 다리를 건너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요 밤하늘에서 가장 빛날 수 있는 행위를 고릅니다 나의 첫 번째 여행 두 개의 다리로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숨이 벅차면 자신을 잡아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왜 저는 두 개뿐인 다리로 당신에게 가려는지요 오, 나의 superego..

한줄 詩 2021.05.15

여행 흐림 - 이규리

여행 흐림 - 이규리 여행은 골목을 바꾸는 일인데, 먼 골목 끝까지 가보았을 때 언젠가 내가 살았던 집인 것처럼 문을 밀자 뭉게뭉게 희부연 구름 덩이가 쏟아져나왔다 손을 휘저어보았지만 손은 잡히지 않았다 이 흐릿한 덩어리들은 다른 곳으로 던진 상한 마음인 것만 같고 덮은 증거도 같고 여행은 슬픔을 바꾸는 일인데, 나는 내 안의 말을 바꾸지 못하여 태도가 태도를 나무라고 있으니 그 골목 허전한 어디쯤 생의 청명이 있기나 하는지 펴보는 빈 손바닥은 머뭇거림과 갈등과 고립과 나는, 안 되는구나 길었구나 저 끝 돌아오라 누가 손짓을 해도 발바닥이 들러붙어 옴짝할 수 없는 구름 골목에서 *시집/ 당신은 첫눈입니까/ 문학동네 이곳과 저곳 사이 - 이규리 ​ 다섯 평을 견디는 낮과 밤들아 너무 애쓰지 마 우리는 잊혀..

한줄 詩 2021.05.15

대척점의 당신, 나무 - 최준

대척점의 당신, 나무 - 최준 나는 나를 번역하지 않았어 지금까지 나는 당신의 중얼거림 밖에서 살아왔으니 의자로, 기둥으로, 불을 품은 육체로 다음 세대에 또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 이념으로 무장한 적 있으니 오, 하지만 당신은 자신이 아직도 태양의 아들임을 알지 못하네 가슴에 드리운 두꺼운 그늘을 뛰어넘으면 밝음이 오리라 기대하며 살지 다만 나는 나였을 뿐 당신이 아니었으니 당신이 아니었던 게 나의 잘못이라면 별은 무엇이고 달은 무엇인가 당신이 자신에게 질문하는 순간 아는가 당신은 내가 될 수도 있었다는 것을 내 속의 얼굴이 당신의 나이테로 불리는 주름이 될 수도 있었다는 것을 낮과 밤을 나누어 살아가지만 예나 지금이나 나는 당신이 아니고 당신은 오늘도 내가 아니네 *시집/ 칸트의 산책로/ 황금알 디아스..

한줄 詩 2021.05.12

멀리 있는 빛 - 이산하

멀리 있는 빛 - 이산하 ​ 친구가 감옥에 박경리의 대하소설 한 질을 보냈다. 책을 전부 바닥에 펼쳐놓자 작은 독방이 토지로 변했다. 난 그 광활한 토지에 씨앗 대신 나를 뿌리며 장례식을 치렀다. 대학시절 시인지망생이었던 그에게 난 박상륭의 소설 를 선물한 적이 있었다. 연쇄살인 뒤 나무 위에서 자진하는 주인공의 최후를 보며 그 도저한 비장미에 우리는 실성한 것처럼 얼마나 압도되었던가. '한라산 필화사건' 수배 때도 인터뷰로 여러 번 은밀히 만났다. 내가 석방되자 '시운동' 동인들의 '이륭 석방환영회'에서 그가 축가로 김영동의 노래 을 불렀다. 어둠은 가까이 있고 빛은 멀리 있는 처연한 노래였다. 깊은 강 같은 노래의 행간이 진짜 노래였다. 29살 그의 눈빛은 심야극장에서 어둠보다 더 어두워졌다. 무엇을..

한줄 詩 2021.05.12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백애송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백애송 출생지가 불분명한 일렬로 늘어선 근조 화환 제 무게에 눌려 고개를 들지 못한다 환한 불빛 아래 잿빛 그림자들 돌아가는 술잔은 채워지지 않고 결국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위로의 말에 서툴기 때문에 가만히 한쪽 날개를 토닥일 뿐 날아갈 수 없는 무게만 가슴 한편 차곡차곡 쌓인다 생활이 지나간 자리에 어려풋이 남은 자국은 희미했다 당신이 없어도 고구마 줄기는 서로 엮여 자라고 푸성귀는 무성해질 것이다 다른 한쪽 날개가 파드득거렸다 *시집/ 우리는 어쩌다 어딘가에서 마주치더라도/ 걷는사람 미니멀리즘 - 백애송 목록을 작성한다 버려야 할 것들은 어제의 마음가짐과 오늘의 마음가짐이 다르다 한 잎이었다가 두 잎이 된다 다시 오는 봄엔 손잡고 모래 위를 걷자고 했던 일 서류봉투의..

한줄 詩 2021.05.12

수돗가에 뜬 달 - 이서린

수돗가에 뜬 달 - 이서린 마을 해치 장구 장단 젓가락 장단에 부부는 일찌감치 해당화 낯빛으로 감 냄새 풍기며 대문을 열었다 눈 흘기는 어린 딸의 볼 비비는 젊은 아비의 턱수염, 딸의 뺨에도 채송화가 피고 이미 물 건너간 저녁밥에 잔뜩 부은 볼 세상모를 조그만 계집아이의 심사(心思) 지아비에겐 여전히 어여쁜 젊은 지어미가 비틀비틀 수돗가에 쪼그려 앉는다 앉으면서 몸빼를 쑤욱 내리곤 쏴아아 한바탕 소낙비를 내린다 씨이, 대문 옆에 변소 있잖아 삐죽거리는 딸의 손을 꼬옥 잡는 아비 허허, 수둣가에 달이 떴네 오늘이 보름인가 내일이 보름인가 저 희고 고운 달 좀 봐라 그 해도 그 달도 지고 없는데 비 오는 달밤은 언제 또 보나 *시집/ 그때 나는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 출판그룹파란 그 남자 - 이서린 경상..

한줄 詩 2021.05.11

버리지 못하는 게 희망뿐이랴 - 정기복

버리지 못하는 게 희망뿐이랴 - 정기복 희망을 버리지 못해 여기 왔다 떼어버리지 못한 갈증을 소주잔에 저당잡힌 채 절망을 불러모았다 흉어의 바다를 딛고 정박한 배 하선을 서두른 선원 몇이 완월동 오촉 전구 아래서 폭풍의 품값을 탕진하도록 꺼질 듯 꺼질 듯 꺼지지 않는 남풋불이 항구의 세월을 그을렸다 부두를 헤집던 비린 바람이 습기 찬 손길로 달려드는 자정 절망을 포기하는 게 술값 치르는 것처럼 쉬운 계산이라면 또 모른다 주머니 속 구겨진 지폐를 꺼내놓듯 살아갈 길 다림질할 수 있다면.... 버리지 못하는 게 어디 희망뿐이랴 *시집/ 어떤 청혼/ 실천문학사 모란공원, 봄 - 정기복 이곳에 오면 오래 걷지 않아도 흙살이 제 혼자 풀림을 금방 압니다 겨우내 언 땅 속에 얼지 않은 들꽃 씨앗과 애벌레 알들이 도..

한줄 詩 2021.05.11

등피 닦던 날 - 이형권

등피 닦던 날 - 이형권 등피를 닦던 날이 있었습니다 나직이 입김을 불어 그을음을 닦아내면 허공처럼 투명해져 낯빛이 드러나고 그런 날 밤 어머니의 등불은 먼 곳에서도 금세 찾아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믐날 동네 여자들은 모두 바다로 가고 물썬 개펄에는 거미처럼 움직이는 불빛들로 가득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보는 바다는 분꽃 향기 나던 누이들의 가슴처럼 싱그럽고 조무래기들은 모닥불을 피우고 북두칠성이 거꾸로 선 북쪽 하늘을 향해 꿈을 쏘아 올렸습니다. 묵은 시간의 표피를 벗겨내듯이 밤하늘에는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가득했고 범바우골 부엉이가 울고 가도록 어머니의 칠게잡이는 끝이 없었습니다 *시집/ 칠산바다/ 문학들 범태상회 - 이형권 아버지가 열무김치에 쓴 소주를 마시던 곳이다 곰살궂게 쫀득거리던 고무과자에 군침..

한줄 詩 2021.05.10

나지막이 부드럽게 - 김태완

나지막이 부드럽게 - 김태완 무거운 몸 이라고 생각하니 더 무거운 몸 부는 바람도 버겁다 걸음은 짧아지고 생각은 깊어지고 평생을 살아도 알 수 없는 길에서 비는 길게 내리고 흘러온 바다 요동치며 뿌리를 흔든다 나 그만 갈래 엄마, 나 그만 가면 안 돼? 나지막이 부드러운 음성 마음을 다독이는 소리 먹먹한 가슴으로 보이는 저기 저 불빛 그래도 가자, 꼭 잡은 손이 따뜻하다 무거운 몸, 일으키니 나지막이 빛 고운 야생화 언제부터 있었던가. *시집/ 아무 눈물이나 틀어줘/ 북인 꿀, 벌 - 김태완 한 무리의 벌 떼 꽃이란 꽃은 모두 움츠린다. 벌은 꿀이 될 수 있을까 혹은 꿀로 벌이 될 수 있을까 마지막이 되어서야 고개를 숙였다. 그 뻣뻣하던 위장을 낮추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이 자세는 인정한다는 뜻과 이..

한줄 詩 2021.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