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아버지와 망원경 - 김재룡

마루안 2021. 5. 23. 19:47

 

 

아버지와 망원경 - 김재룡

 

 

다락방에  바라다보는 우묵한 정릉 골짜기, 건너편 봉국사 옆 산림조합으로 이른 새벽 잡역부로 일 나가는 어머니. 북악터널을 빠져나온 장의차가 심심찮게 보였다. 배밭골 쪽에서 불어오던 바람이 방향을 틀어 청수장 깊은 골짜기로 먹혀 들어간 다음엔 장마철 한때 굵은 빗줄기들이 온통 도깨비장난 하듯 퍼붓기도 했다.

 

귀신 나온다던 폐허였던 경일고등학교 자리에 웬 학교 건물이 그렇게 크게 들어설 줄 누가 꿈에라도 생각했을까. 거대 건물이 빼곡히 들어선 학교 쪽을 왼편으로 눈 흘기며 치어다보는 비탈진 언덕 비탈진 셋집 다락방에서 건너다보는 북악스카이웨이며 남산의 불빛은 어찌 그리도 휘황하던지.

 

어머니는 여섯 살이 된 나를 데리고 개가하여 밑으로 동생 둘을 보았다. 큰아들 대학 졸업시키고 결혼시켜 셋방 얻어 분가시켰다. 의부는 늦깎이 목수였다. 큰아들 공부시킨다고 무작정 상경하여 스무 해 막노동판을 전전한 후였다. 덜컥 찾아온 피오줌 나오는 한타바이러스에 의한 유행성출혈열. 한 달 입원 후 퇴원 한 달 만에 눈감으신 아버지. 실직 반년 동안 내가 쓰던 다락방에 올라가 계셨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삼우제 지난 다음 날. 휴가 중인 동생이 장롱을 정리하다가 서랍을 빼낸 맨 밑바닥에서 찾아낸 몇 가지 물건을 펼쳐놓고 울고 있었다. 만 원권이며 천 원권 빛바랜 지폐 몇 장. 가죽 주머니에 들어 있는 작은 망원경. 중앙시장 도깨비골목에서 사들이셨을 아이보리 비누며 외제 상표의 줄 뺀찌 망치 같은 자잘한 연장들. 이미 깊은 죽음의 뒤안에서 건져낸 모질고도 허망한 삶의 편린들.

 

의뭉한 영감태기 돈을 다 감춰놓았다고 앞니가 다 빠져나가는 어머니는 애써 웃음 짓는데. 아이보리 비누야 손자 좋을 거라고 구하셔서 이제저제 망설이다 기회를 놓쳤을 터이고. 연장 몇 개야 목수일 하시던 분이니 그러려니 했지만. 글쎄 망원경. 망원경을 들고 남은 식구 모두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건너편 능이 있는 골짜기 넘어 오늘도 흐린 바람은 불어오는데. 평생 남의 집이나 짓다가 당신 집 한 칸 짓지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지. 아랫동네 호화 주택들이 빤히 내려다보이는 달동네 셋집 비탈진 다락방에서 아버지는 망원경으로 무엇을 보았을까. 아버지는 망원경으로 무엇을 찾았을까.

 

 

*시집/ 개망초 연대기/ 달아실출판사

 

 

 

 

 

 

앞발 - 김재룡

 

 

모든 사물의 근원으로 다가가면 모태가 보인다. 해도 달도 산도 바다도 돌멩이도 컵도 시계도 달팽이도 지렁이도 어머니가 있다. 어머니. 나를 나일 수밖에 없도록 만든 존재의 심연에서부터 내 얼굴의 주름살에까지 내 손톱 끝에까지 어머니가 있다. 하여 나는 가끔 어머니의 어머니 또 다른 나인 어머니의 남편이 되기도 하고 어머니는 내게 딸이 되기도 하고 아내가 되기도 하고 아들이기도 하다. 하여 큰 아들의 휴대폰번호를 외우기 힘들어진 늙은 어머니의 주름진 손을 닮아가는 뭉특하고 작은 내 손은 어머니의 앞발이었으면 좋겠다.

 

 

 

 

# 김재룡 시인은 1957년 경기 양주 출생으로 강원대 사범대학 체육교육과를 졸업했다. 1985년 <심상>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1989년 전교조 결성부터 현재까지 조합원으로 있다. 서울과 강원도 등에서 오랜 기간 체육 교사로 근무하다 2019년 8월 화천고등학교에서 정년을 맞았다. <개망초 연대기>가 생애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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