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잘 가라, 세상 - 임성용

마루안 2021. 5. 23. 19:43

 

 

잘 가라, 세상 - 임성용


우리는 쉬지 않고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죽고 싶어도 사는 사람들
우리는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사람들이다
살고 싶어도 죽는 사람들

다녀올게요
오늘까지 일하고 나는 죽었어요
저녁부터는 쉬어도 돼요
내일은 깨우지 마세요

어머니는 시커멓게 타버린 나를 낳았어요
꿈도 없는 아버지는 나에게 꿈을 묻지 않았어요
당신은 달아나는 꿈을 얼마만큼 쫒고 있습니까?
당신의 꿈은 누구의 편입니까? 

우리는 탈출하지 못했다
우리는 순식간에 갇혔다
우리는 한꺼번에 죽었다
우리는 보통 떼죽음을 당했다
우리들의 시체는 여기저기 분산되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세상은 불덩어리였다

구급차는 날마다 우리에게 달려온다
우리를 태우고 떠나기 위해 줄지어 기다린다
나도 내 얼굴을 알아볼 수 없다
나는 내가 이렇게 죽을 줄 알았다
잘 가라, 세상!

 

 

*시집/ 흐린 저녁의 말들/ 반걸음

 

 

 

 

 

 

봄밤 - 임성용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은 밤에
잠은 오더니
꽃이 필 것 같지도 않은 봄에
꽃은 피었네

늦잠도 많은데
잠 좀 자게 놔둘걸
일어나라고 깨워서
미안해, 미안해
우리 좋아하는 계절은
또 오고 넘어지고
이제 오래도록 잘 자요

 

 

 

 

# 임성용 시인은 1965년 전남 보성 출생으로 1992년 노동자문예 <삶글>에 시와 소설을 발표하면서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하늘공장>, <풀타임>, <흐린 저녁의 말들>이 있다. 2002년 제11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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