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미지의 나날 - 윤석정

마루안 2021. 5. 29. 21:52

 

 

미지의 나날 - 윤석정


나이를 들어도
비슷비슷한 나날들의 미묘한 차이를 몰라
나는 차이에서 막막하고 나날에서 막연하다
나날들의 이름에 얼굴이 있을 텐데
내가 알 수 없는 얼굴들은 어둡다

휴대 전화의 이름을 들여다보다가
그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아도
동명이인의 얼굴들이 마구 겹쳐도
혹여 그가 최초의 내 얼굴을 이미 삭제했더라도
나는 알 수 없는 얼굴들의 이름을 지울 수 없다
그의 이름은 미지이므로
때때로 해묵은 일기장 속의 얼굴들이
영영 다다를 수 없는 미지의 저편처럼
점점이 어두워지고
내가 관통했던 시공의 얼굴들은 검정으로 변했으므로

하여 내게 미지의 나날은 검정
미지의 이름은 최초의 어둠
영혼은 투명
나의 얼굴에 영혼이 담겨
나의 이름도 투명이어야 될 텐데
나이가 들수록
최초의 얼굴들은 밥 먹듯 나날을 바꾸더니
막막하고 막연한 생이 된다


*시집/ 누가 우리의 안부를 묻지 않아도/ 걷는사람

 

 

 

 

 

 

앉은잠 - 윤석정

 

 

한낮의 별이 침대에서 한소끔 끓다가 거의 다 식어갈 때까지

 

한 뼘도 움직이지 않고 쪽창 아래 의자에 앉아 있는

 

잘게 부서지고 흩어지다가 갑자기 가늘어진 볕을 쬐고 있는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렸던 일일연속극처럼 기억의 채널을 돌리는

 

목구멍에 자란 병을 절제하면서 니은 모양으로만 자야 하는

 

밤새 침대에 눕지 못한 잠 떼가 몰려와 자기도 모르게 풀었다가 잠그는

 

어느 채널에 지난날을 통째로 붙잡히고 남은 시간의 초침을 세듯 머리를 꾸벅거리는

 

죽을 때까지 침대에 바로 누울 수 없는

 

사람, 한때 사람 형상이었다가 폭삭 사그라지는

 

 

 

 

*시인의 말

 

지난 십 년 나는 나를 걸쳐 입고 나의 바깥을 맴돌았다. 간간이 시를 썼고 누구에게도 안부를 묻지 못했다. 이제 바깥의 반대편을 모르겠다. 반대편 입구는 아예 없어졌거나 어딘가로 숨은 게 아닐까 싶었다. 이대로 살아야 할 것만 같았고 막연히 건너야 할 것만 같았다. 시 쓰는 일을 그만두면 바깥 생활이 조금은 편해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십 년 동안의 시를 한데 엮으며 알았다. 시가, 그리고 무궁한 당신들이 나의 바깥이었다는 것.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성이다 - 박형욱  (0) 2021.05.30
다음 생까지는 멀고 - 김윤배  (0) 2021.05.30
나는 울지 않는 바람이다 - 천양희  (0) 2021.05.29
도반(道伴) - 이상국  (0) 2021.05.28
새가 날아간 후 - 박주하  (0) 2021.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