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물의 저녁 - 손남숙

마루안 2021. 5. 27. 19:42

 

 

물의 저녁 - 손남숙


물결이 나무의 한 생애를 주름으로 집적하여 기화된다
올라와 한때 푸르렀던 시간
기억은 가지를 들고 사라지는 한 잎

늦가을 스산한 바람을 타고
흔들리는 잎들의 커다란 환전
깊은 고요와 심해의 물고기와 같은 호흡이 굽이쳐

어쩌면 잎잎이 저렇게 버적거리나
생애의 달콤한 먼지는 늘어질 수밖에 없지, 쌓이므로
연거푸 날아가는 새들이 부르짖는 세계

아른거리는 노래의 후렴구는
만삭의 흩날림과도 같고
그 모든 것들을 붉게 연주하는 계절을 잊었네

해마다 되비쳐 오는 상처를 물에 앉히면
슬금슬금 돋아 나오는 물의 무늬
어스름 저녁의 과오와 같은 물결


*시집/ 새는 왜 내 입안에 집을 짓는 걸까/ 걷는사람

 

 

 

 

 

 

찰칵 - 손남숙


세 시간 동안 앉아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까지 세 시간이나
내가 안 것은 고작 그것이었다
왕버들은 수백 년 수만 시간을 그 자리에 있었고
나는 잠시 지나가는 먼지나 비구름 같은 것

자연을 단번에 읽으려고 한 나의 요약본능이 부끄러워졌다
요약은 공부하기 싫은 사람이 하는 일
효율을 따지는 관리들이 하는 일
수업하기 싫은 아이들이 핑계 대는 것들 중 하나

내 몸의 칠십 프로는 물이고 나무 역시 그렇다
물로써 연대할 수 있는 친연성
그것은 구멍과 구멍
흡수와 발산을 통한 알아챔
서로의 눈동자에 고이는 정겨운 물길을 알아보는 것

그러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무에게로 허리를 굽힌 세 시간
나는 만지작거리던 오후를 내려놓고 나무의 굽이치는 세월을
흠뻑 가까이로 당긴다
나무는 그런 나를 찰칵, 하고 찍는다
어떤 먼지가 세 시간이나 머물다 갔는지 기억하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