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다음 생까지는 멀고 - 김윤배

마루안 2021. 5. 30. 19:36

 

 

다음 생까지는 멀고 - 김윤배


왜 흰 회벽으로 된 방에 유폐되어 있는지

천천히 하얀 회벽을 둘러보거나
낡은 서간집의 표지를 들여다보거나
부장품, 레벡의 네 현을 튕겨보거나
Time to say goodbye를 허밍으로 노래하거나
여러 개의 촛불을 창틀에 올려놓거나

실루엣이 하얀 회벽에 유령처럼 일렁인다

젖은 눈을 감았다 뜨면 밤이고 다시 감았다 뜨면 낮이다
밤과 낮이 눈동자 안에 있다

창틀의 촛불이 꺼지기 시작한다

황홀한 착란의 시절은 스치듯 지나갔다
유폐는 선택이었다, 밤은 며칠씩 계속되었으니
잠시 행복했고, 늘 얼어 있는 입술로 불행했다
얼어 있는 입술을 이 생에서 녹일 수 없다

다음 생까지는 멀고


*시집/ 언약, 아름다웠다/ 현대시학사

 

 

 

 

 


청춘 - 김윤배


숲속의 야생화는 아직 지려고 하지 않았는데

마음 조급해서 어두워지는 준령에 숲을 그리고
야생화를 그리지 않았던 것이다

숲은 그곳에 사는 사람의 숨결이다

숨겨놓은 자작나무숲은 며칠째 화마를 건너고 있었다

마지막 화폭을 위해서 불타는 숲을 떠나지 않았다
마지막 화폭은 잿더미로 쓴 유서였다

숲에는 지금도 준령을 담은 화폭이 야생화 사이를 떠돈다

젊은 날이어서 

화가의 이름으로 불타버린 자작나무숲을 부른다
잿더미 위에 별들 지나간 흔적 남아 있다

청춘은 그렇게 지나가는 것이다
수많은 청춘이 준령에 젊음을 헌정한 후

준령은 야생화의 꽃그늘이거나 숲을 건너온 부드러운 바람이거나

목 놓아 부르는 이름이었다


 

 

# 김윤배 시인은 1944년 충북 청주 출생으로 한국방송통신대, 고려대 교육대학원 및 인하대 국문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6년 <세계의 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겨울 숲에서>, <떠돌이의 노래>, <강 깊은 당신 편지>, <굴욕은 아름답다>, <따뜻한 말 속에 욕망이 숨어 있다>, <슬프도록 비천하고 슬프도록 당당한>, <부론에서 길을 잃다>,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바람의 등을 보았다>, <마침내, 네가 비밀이 되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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