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우물에 대한 기억 - 최준

마루안 2021. 5. 27. 19:52

 

 

우물에 대한 기억 - 최준

 

 

계산속으로는

하루에 하루를 더하면 이틀이 맞다 맞지만

두레박에서 부엌까지

여름에서 다시 여름까지

하늘을 이고

물동이가 오간 거리는 별들이나 읽을 수 있던 시간

 

할머니 적 얘기다

우물 안 개구리가 구름 위로 팔짝 뛰어오르기도 하고

버드나무 화살촉 하나가 그 어두운 구멍을 향해

잘못 쏘아지기도 하고

넘칠 일 없는 함박눈이 둥근 적요를 메워보려고

무리하게 겨울을 온통 겨울로 안간힘 쓸 때도

무릎 한 번 출렁이지 않고 그냥 버텼을 거다

 

할머니 돌아가신 지 삼십 년

뒤란 장독대를 반짝여주던 북극성을 묻어버리고

버드나무 밑동을 잘라

마지막 아궁이에 불을 지피던 저녁

 

남몰래 지워진 길이 하나 있었을 거다

아무도 만져주지 않았던 시간이 저 홀로

먼 길을 가고 있었을 거다

눈물 흘러넘치면서

먼 산 무덤 속으로 그 하루를

무쇠솥에 펄펄 물 끓였을 거다

 

이건 다 할머니 적 얘기

돌아오기도 전에

일찍 집을 떠났던 아버지는 아주 멀리서

너무 늦게야 할머니의 이름을 불렀다

이를테면, 내가 어머니를 우물에 빠뜨리고 나서야

물동이가 비어 있었음을 알아챘듯이

 

 

*시집/ 칸트의 산책로/ 황금알

 

 

 

 

 

 

가여운 추억 - 최준

 

 

길에 대한 기억밖엔 없네

 

엄마, 당신이 끌고 가신 유년

 

네 번의 전학과 일곱 번의 이별 사이에서

선풍기가 태어나고 사벌식 타자기 그리고, 냉장고

티브이는 실내 안테나에서 위성으로

 

천연색 그리움을 가르쳐주려 그러셨나요

 

젖가슴에서 엄마에서

추억의 어머니로

 

유모차는 영원히 당신 것

세발자전거는 아직도 내 것

 

아, 엄마 안 계신 추억이 무거워

땀 젖은 신발 벗듯, 아무 데서나 내려놓네

 

 

 

 

*시인의 말

 

삶의 시간이 늘 버겁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어제와

살아 있으니 살아야 하는 오늘과

미지의 내일 사이에 늘 어둠이 도사리고 있다.

 

시간이라는 게 대체 무엇인가?

누구도 정의하지 못한 시간을 여직 버티면서

고단한 삶을 함께한 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살아 있는 한

지상의 모든 이들도 더불어 살아 있기를.

 

사랑한다. 문명과 자연을, 사람을,

시간을 공평하게 나누어 가진

생사의 한 시절을 함께했다는 그 인연만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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