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숨겨둔 오지(奧地) - 배정숙

숨겨둔 오지(奧地) - 배정숙 보리앵두 제 풀에 익어 떨어지던 여름이 안으로 걸어 잠근 빗장의 암호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더딘 저녁상에 잰걸음으로 와서 고꾸라지던 허기의 붉은 발목 그 왼쪽은 늘 가을 쪽으로 기울고 싶었습니다 장독대 옆 정구지꽃 잘 퍼진 흰 쌀밥에 흘러간 시간이 배고파 칭얼댑니다 어머니가 읽고 또 읽고 유일신으로 신봉하시던 콩밭고랑 경전 개망초꽃 노란 눈알만 극구 제철 만났습니다 어머니 하고 불러보는 목젖 밑으로 울컥 솟는 초저녁 달 발아래로 엎어지는 눈물 냄새 날갯죽지 느슨하게 풀어놓고 싫어요- 아니오- 맘껏 외쳐도 덜미가 편안한 안전지대 이제 풋감 같은 큰 누이가 살이 오르던 찰진 시간을 어디에 숨겨놓고 바람이 편히 잠 들까요 마지막 모음의 탯자리까지 잃어버리고 허접한 부리를 어디에 묻..

한줄 詩 2021.06.28

관계에 관한 짧은 검색 - 천수호

관계에 관한 짧은 검색 - 천수호 나막신만한 배들이 정박해 있는 낙동강 하구언 작은 나루에 짧은 철로 두 개가 강물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다 잿빛 물은 깊고 철로는 해맑은데 나는 멀리 가야 할 사람 철로 끝에 가만가만 발끝도 대어보고 손끝으로 밀어봐도 쓰임이라는 건 도저히 잡히지 않고 투신이라는 벚꽃 잎만 낭자하게 날리는 사월 물결이 깨웠다 재웠다 하는 강물 위 물과 철로의 관계는 검색되지 않지만 배와 철로는 금방 닿을 수 있다 배를 미는 철로, 배를 맞는 철로, 배를 들어올리는 철로 가볍게 검색대를 통과하는 사람처럼 배를 한 번 들어올렸다가 내리는 관계 쓰임을 모르는 철로가 곤두박질친 바닷물의 합수 지역 강은 짐이 없고 바다는 챙이 큰 구름을 짐처럼 이고 있고 저 배와 관계없는 나는 구름보다 멀리 갈 ..

한줄 詩 2021.06.28

순록이 있는 창밖 - 이자규

순록이 있는 창밖 - 이자규 술 한 병의 노동과 구름과자가 자유였다 그의 침상에 혈압계 살피는 발길들이 분홍 꽃병에 물을 채우고 갔다 마음관이 녹슬어 굳은 지 오래 고지혈 보일러 관 피떡이 공사 불가능인지 오래 아껴둔 동지팥죽 그릇이 얼어 터졌다 수도관 터져 폭탄 파열을 첫새벽에 홀로 감당해 보는 맛, 얼음은 천장에 부딪치는 반작용으로 내 정수리를 때렸다 우주로 연결된 모든 파이프의 통설이 각인되는 순간 다시 그 얼음 알을 천천히 입에 넣었다, 뜨거웠다 옛집 행랑채 처마 밑까지 쌓아올린 장작더미, 쇠죽솥 활활 타던 아궁이에 장작을 던지듯 팥죽 얹은 제단에 촛불을 올렸다 고향 산의 구들장 들어낸 곳이 명당자리라 했다 관과 관은 피와 물의 언어라는 것 거짓으로라도 순환되어야 할 흰 털 짐승을 몰고 불빛 하나..

한줄 詩 2021.06.27

소심한 후회 - 박형욱

소심한 후회 - 박형욱 쇠비름 개망초 광대나물 바랭이,,,, 마당가에 잡초를 뽑는다 결국 함께 갈 수 없다고 그런 나그네들이라고 생각했다면 처음부터 통성명하지 말 것을 악수를 나누며 건네진 온기가 아직 말초에 남아 있는데 지갑 속에 차곡차곡 모아 놓은 명함들 꺼내보면 다시 만날 사람 몇이나 될까 공연하게 휴지통으로 던져버린 욕심과 체면의 수인사 알고 보면 다 사연 있고 나쁜 사람 드물 듯이 도감 펼쳐 보면 약초 아닌 잡초 없는데 미워서가 아니다 쓸모없어서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를 사랑할 수 없어서 내 마음 온전히 다 줄 수 없어서 산란한 마음 번잡해서 뽑는다 보는 이 없어도 괜시리 아픈 마당가 풀을 뽑는다 *시집/ 이름을 달고 사는 것들의 슬픔/ 지혜 낭만에 대하여 - 박형욱 논둑길 산책하고 돌아오는 길 ..

한줄 詩 2021.06.27

로봇 0호 - 윤석정

로봇 0호 - 윤석정 오십 살 영호 씨는 공허 속의 고물, 버린 짐짝 같은 흉물이 됐다 주물공장이 헛물켜던 때부터였다 영호 씨의 관절이 움직였던 모터가 멈췄다 모터에서 번쩍 수백만 볼트의 불꽃이 터졌다 사랑의 기억장치가 리셋됐다 영호 씨 모터를 누볐던 기름이 제자리에 멈췄다 기름 한 방울 한 방울 가슴 언저리로 새어 나왔고 영호 씨는 급속도로 녹슬었다 최신의 모터를 장착했던 첨단의 과거 영호 씨는 사랑의 형식을 반복하여 생산했고 주물공장은 모든 형식에는 유행이 있다고 했다 유행이 지나면 다른 유행으로 대체되고 또 다른 영호 씨로 교체되는 시스템 속에서 영호 씨의 기억장치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영호 씨는 반복의 형식을 반복할 뿐 반복되지 않는 사랑의 형식이 주입된 적이 없었다 사랑을 포기한 사람처럼 비에 ..

한줄 詩 2021.06.27

세습의 기술 - 조기조

세습의 기술 - 조기조 척박하든 기름지든 태어난 자리에서 생을 다하는 너는 붉은 꽃을 피워 말한다 염치없이 챙기기만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고 붉은 열매를 달고 말한다 무턱대고 주기만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다른 이의 욕망보다 자신의 욕망으로 살아가는 너는 말한다 대롱의 욕망으로 꿀을 만들고 부리의 욕망으로 과육을 익히고 바람의 욕망으로 씨앗을 말리며 자가수분처럼 세습처럼 음탕한 것은 없다고 붉은 씨앗을 날리며 너는 말한다. *시집/ 기술자가 등장하는 시간/ 도서출판 b 기술자의 가방 - 조기조 기술자의 가방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당신을 꼼짝 못 하게 만든 문제가 해결만 된다면 기뻐할 뿐 당신을 애태우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짜증을 낼 뿐 나사 하나 바꾸고 몇만 원 받는다고 사기..

한줄 詩 2021.06.26

안구주사를 맞고 - 황동규

안구주사를 맞고 - 황동규 한 달에 한 번 병원 침대에 누워 외눈 덮개로 얼굴 가리고 황반변성 안구주사를 맞고 거즈로 덮은 눈과 산동산(散瞳)약 넣어 초점 잃은 눈 위에 안경을 얹고 희미하게 놓인 구두 찾아 꿰 신고 병원을 나선다. 어른거리는 붉은 불빛, 걸음을 멈춘다. 9년 전인가 서천군 마량 선창가, 생선 부리는 배에 걸린 늘어진 깃발들이 안개 속에 갑오징어들처럼 매달려 있을 때 생선 잔뜩 실은 자전거 무게에 눌려 핸들 붙잡고 꼼짝없이 서 있던 사내, 눈은 뜨고 있었던가? 잠깐이 한참이었다. 안개 저편에서 인기척처럼 경적이 울리고 핸들에 매달린 그가 자전거 바퀴에 끌려간 뒤에도 나는 거기 서 있었다. 용케 넘어지지 않고 안개 밖으로 빠져나갔군. 걸음 떼는 순간 내가 그만 발 헛딛고 비틀거렸지. 동공 ..

한줄 詩 2021.06.26

죄가 있다, 살아야겠다 - 이문재

죄가 있다, 살아야겠다 - 이문재 죄짓고 살자 오늘 밤 아기 예수 다시 오시도록 죄 많이 지으며 살자 원수를 미워하자 자비로부터 멀어지자 오늘부터 부처님 외롭지 않으시도록 우리 죄짓되 죄다운 죄 지으며 살자 원수를 저주하되 원수다운 원수를 저주하자 물론 법도 어기자 어길 만한 법 어겨서 법이 법다워질 수 있도록 법도 어기며 살자 죄가 있다 살아봐야겠다 보란 듯이 한번 살아봐야겠다 *시집/ 혼자의 넓이/ 창비 얼굴 - 이문재 -아주 낯익은 낯선 이야기 내 얼굴은 나를 향하지 못한다 내 눈은 내 마음을 바라보지 못하고 내 손은 내 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얼굴은 남의 것이다 손은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기 위한 것 누군가에게 내밀기 위한 것이다 입과 코가 그렇고 두 귀는 물론 두 발도 그러하다 안 못지않게 바..

한줄 詩 2021.06.26

흐르는 강물처럼 - 김재룡

흐르는 강물처럼 - 김재룡 사랑, 그런 거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사랑이라는 건 목숨을 거는 거예요. 속삭이듯 말했다. 그런 것이었다. 흐르는 강물처럼 속절없는 것이었다. 목숨을 걸 수 없었으므로 내 사랑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죽었다. 그날이었다. 천년의 세월은커녕 단 하루도 기약하지 못하고 소멸되었다. 안녕. 그렇게 내 그대를 떠났던 것은 세상의 처음이 궁금해서였을 터이다. 애초에 뒤돌아 볼 일이 아니었다. 떠나온 것들에 대하여 뒤돌아보는 것도 어쩔 수 없겠다. 작정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끊임없이 뒤를 돌아보는 동안이겠다. 그대 또한 깊어가는 강물의 가장 깊은 곳만큼 아주 조금은 흔들렸으리라. 죽어 떠나간 것들이 살아 있는 것들을 뒤돌아보는 것이다. 떠나야 만날 수 있는 세상의 끝..

한줄 詩 2021.06.25

유월의 구름 - 최준

유월의 구름 - 최준 흙먼지 뒤집어쓰고도 하얗게, 환하게 웃던 아까시꽃이 너무 눈부셨을까 길이 피를 더렵혔다고 이제 그만 객석에서 일어서야 한다고 극장 뒷문으로 공기처럼 조용히 사라지던 그를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는데 스크린에서 계속되는 도살 관객들은 너무 잔혹하다며 아우성이었는데 어떤 매몰지도 그를 기다리지 않아 소리 없는 세계로 가고자 했던 걸까 나이가 서른 살이었던 건 그가 이십 대의 산맥을 지나왔다는 것 모든 소멸을 무사히 버텨냈다는 것, 그러니 자 이제 어디로 간다? 복수로 무거워진 배를 끌어안고서는 복수를 꿈꿀 노릇도 이미 아니었는데 총도 아니고 칼도 아닌 말씀으로 내일을 예언하던 일기예보 믿지 못하고 멈출 수도 없어 그는 허공에 발을 내딛기로 했다 내 귀가 너무 커져서 그래 옥상을 긋고 지나..

한줄 詩 2021.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