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는 울지 않는 바람이다 - 천양희

마루안 2021. 5. 29. 21:47

 

 

나는 울지 않는 바람이다 - 천양희


마음 끝이 벼랑이거나
하루가 지루할 때마다
바람이라도 한바탕 쏟아지기를 바랄 때가 있다

자기만의 지붕을 갖고 싶어서
우산을 만들었다는 사람을 떠올릴 때마다
후박잎을 우산처럼 쓰고 비바람 속을 걸어가던 네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별명이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 랭보를 생각할 때마다
바람은 그리워하는 마음들이 서로 부르며 손짓하는 것이라던
절절한 구절을 옮겨 적고 싶을 때가 있다

나는 울지 않는 바람이라고 다른 얼굴을 할 때마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던 죽은 시인의 시를 중얼거릴 때가 있다

여러 번 내가 나를 얻지 못해 바람을 맞을 때마다
바람 속에 얼굴을 묻고 오래 일어나지 못할 때가 있다

이 세상 어디에 꽃처럼 피우는 바람이 있다면
바람에도 방향이 있고 그 속에도 뼈가 있다고 말할 것이다

바람 소리든 울음 소리든 소리는 존재의 울림이니까
쌓아도 쌓아도 그 소리는 탑이 될 수 없으니까

바람이여
우리가 함께 가벼워도 되겠습니까

오늘 밤에도 산위로 바람 부니
비 오겠습니다

 

 

*시집/ 지독히 다행한/ 창비

 

 

 

 

 

 

바람길 - 천양희


먼 땅을 향해 날아가는 제비는
두루미 등 뒤에서 때때로 쉬며 날아간다는데
이 땅이 먼 길인 나는
두 발이 지치면 바람 속에 얼굴을 묻고 때때로 쉰다
누가 뭐래도 내 뒷백은
세상에서 제일 가벼운 바람
바람이 있다면 나도 제비처럼
바람의 등 뒤에서 때때로 쉬며 날아가는 것
오늘따라 바람 들린 잡새들
나보다도 더 오래 바람 속을 헤맨다
새들은 과거가 없어 바람 속을 거슬러가나
세상에서 제일 가벼운 것이 바람이란 걸 알고 있나
바람! 바람이 불 때마다
나는 가벼워지고 싶었다
바람처럼 가벼워져선
흔적 없는 바람같이 대단한 여행자가 될수 있다면
바람은 언제나 정처없는 자의 것이다
나무 뒤에 나무처럼 서서
날개 없는 것들을 생각한다

나는 왜 바닥을 치면서 날고만 싶어 하나
사람은 왜 바람을 꽃처럼 피우면 안 되나

탓하지 말자
모든 길은 바람길이므로

 

 

 

 

# 천양희 시인은 1942년 부산 출생으로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 <사람 그리운 도시>, <하루치의 희망>, <마음의 수수밭>, <오래된 골목>,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 있는가>, <너무 많은 입>,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새벽에 생각하다>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만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음 생까지는 멀고 - 김윤배  (0) 2021.05.30
미지의 나날 - 윤석정  (0) 2021.05.29
도반(道伴) - 이상국  (0) 2021.05.28
새가 날아간 후 - 박주하  (0) 2021.05.28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 손병걸  (0) 2021.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