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갈대로 사는 법 - 박봉준

갈대로 사는 법 - 박봉준 호숫가의 바람이 어디서 오는지 갈대를 보면 안다 뒤돌아서서 바람을 귓등으로 흘려보내는 갈대는 고개만 끄덕일 뿐 결코 맞서지 않는다 약자의 생존 방식을 누가 함부로 말하는가 먼저 나서지 말거라 아버지는 나에게 유언처럼 말씀하셨다 백발이 빛나는 갈대를 보면 이십 리 장에 가셨다가 해거름에 오시는 아버지 같다 그렇게 사셔도 기껏 예순다섯 해밖에 못 사셨다 *시집/ 단 한 번을 위한 변명/ 상상인 내 편 - 박봉준 ​ 식구끼리 편 가른다고 어릴 적 어머니한테 그렇게 혼나고도 지금도 그 버릇은 뼛속에 파편처럼 박혀서 기회만 되면 뽀족한 가시를 세웁니다 엎치락뒤치락 새벽에야 끝난 개표방송 우리 편이 졌다고 우울하다는 친구가 꽃은 이미 시들었으니 바람이나 쐬러 가자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우리..

한줄 詩 2022.09.05

중간에서 만나자는 말 - 강회진

중간에서 만나자는 말 - 강회진 조선시대 시집간 딸은 명절이 오면 어머니와 반보기를 했다지 친정어머니가 반, 시집간 딸이 반 중간에서 짧은 만남 후 아쉬운 이별을 했다는 반보기 세상에서 이토록 간절한 말 중간에서 만나자는 말 내가 반을 가고 당신이 반을 오면 반이라도 만날 수 있는가 우리는 너무 멀리 가거나 혹은 미처 이르지 못해 결국 만나지 못하고 당신과 나의 중간은 어디쯤인가 지도에도 없는 중간에서 만나자는 말 세상에서 이토록 슬픈 말 *시집/ 상냥한 인생은 사라지고/ 현대시학사 고독한 덩어리 - 강회진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별은 6000여 개 이곳이 아닌 다는 곳에 가면 더 많은 별들을 볼 수 있을까 그러나 그날 본 그 별들이 내가 본 최초의 별이자 마지막 별이었다는 것을 떠나온 후에야 알게 ..

한줄 詩 2022.09.05

바깥에 대하여 - 황현중

바깥에 대하여 - 황현중 세상의 바깥이 없다면 어떻게 안으로 들어가겠어 꽁꽁 언 손을 엄니가 어떻게 따뜻한 아랫목에 넣어 주겠어 바깥이 없다면 새벽에 오줌 누러 나갔다가 바라보던 달과 별과 여치 울음소리는 어쩌라고 엄니의 품속으로 기어들어 가 더듬던 그 까만 젖꼭지는 어쩌라고 인심 좋은 애비가 어떻게 동네 사람들을 집 안으로 불러들여 신김치에 막걸리 한잔 대접하겠어 바깥이 없다면 고맙다고 누가 인사나 하겠어 잘 가라고 누가 손이나 흔들겠어 세상의 바깥이 없었다면 내가 세상으로 나가 이만큼 사람 노릇이나 했겠어 귀여운 어린애들 머리 한번 쓰다듬을 수 있겠어 어떻게 세상을 어루만지겠어 밖에서 더듬지 않으면 손을 더듬지 않고 입술을 더듬지 않고 서로가 얼싸안지 않으면 그녀를 만나 사랑이나 한번 했겠어 *시집/..

한줄 詩 2022.09.03

마장동 - 신동호

마장동 - 신동호 ​ 마장동에서는 네발로 걸어도 된다 간혹 소처럼 우우 울어도 뭐라 안 한다 소가 흘린 만큼 눈물을 쏟아내도 그저 슬그머니 소주 한병 가져다놓는 곳 죽음을 담아 삶으로 내놓기를 반복해서 달구지 구르듯 고기 굽는 소리 들리는 곳 인생도 굴러가다보면 깨닫는 게 있고 닳고 닳아 삐걱이다보면 기준도 생기는 법 축산물시장의 처녑에선 풀 냄새가 난다 한숨을 주워 담는 아주머니들이 있다 막막한 꿈이 흔들거릴 땐 마장동에 간다 네발로 기다가 끔뻑끔뻑, 울어도 좋을 *시집/ 그림자를 가지러 가야 한다/ 창비 탓 - 신동호 -백석의 자작나무에게 남도에 가닿아 흰밥 한수저에 새우젓 하나 얹어보았는데, 참 맛깔났는데, 우풍 드는 방구석이 그리운 건 순전히 변방에서 자란 탓이다 툇마루를 닦고 또 닦은들 해가 기..

한줄 詩 2022.09.03

사랑의 목소리로 - 박판식

사랑의 목소리로 - 박판식 튀긴 물고기와 가느다란 사랑, 그리고 사랑 없는 관공서의 조용한 오후 나는 마침내 내 인생에서 서울을 발견한다, 삼만오천 평의 하늘 그 모퉁이에서 어린아이는 장난감 자동차를 밀고 하얀 두루마기를 걸친 구름이 잔뜩 짜증난 왕처럼 관악산을 넘어온다 밀과 보리가 자라네, 밀과 보리가 자라네 골프공이 골프채에 얻어맞는 소리, 이것이 인생이다 꿈에 나는 일등석 기차를 탔다, 헛수고였다 알몸의 흑인 여자를 만졌다, 헛수고였다 소나무 냄새 나는 소년이 작은 명상 속에서 생겨났다 오솔길로 사라졌다, 헛수고였다 왕이 짜증을 내면 왕비는 불안하고 우울했다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 부르고 이 세상의 법칙에 속아 넘어가지 않으면 또 어쩔 텐가 빌려 입은 옷 같은 인생, 떼쓰는 어린애를 안고 정부 보..

한줄 詩 2022.09.02

화투의 방식 - 박은영

화투의 방식 - 박은영 한때, 꽃이었던 적이 있었다 승부욕이 투철해 모이면 패를 섞었다 숨소리를 죽인 채 기리를 떼고 호기롭게 퉁을 외쳤다 뻑, 하면 싸고 나가리가 되었지만 폭탄을 안고 살았다 못 먹어도 붉거나 푸른 띠를 두르고 눈먼 새 다섯 마리를 잡으러 날밤을 샜다 죽고 사는 일이었다 그러나 싹쓸이를 한 인간은 죽지도 않았다 패 한 장을 잃은 나는 광을 팔았다 나중엔 껍데기도 팔았다 막판을 웃으면서 끝낸 적이 있던가 우리는 판을 엎고 멱살잡이를 하며 막판까지 갔다 흩날리는 꽃잎들, 그땐 모두가 화를 잘 냈다 딴 사람은 없고 잃은 사람만 있었다 *시집/ 우리의 피는 얇아서/ 시인의일요일 만두 - 박은영 우리의 피는 얇아서 가죽이라고 말하기 부끄러웠다 비칠까 봐 커튼을 치고 살아도 속내를 들켰다 틈은 많..

한줄 詩 2022.09.02

어제 떠나지 못한 사람 - 문신

어제 떠나지 못한 사람 - 문신 나는 지금 앵두나무 아래 서 있다 봄날처럼 앵두나무는 무성한데 앵두는 없고 글썽하게 앵두를 훑던 바람만 갈팡질팡이다 지금 앵두나무를 지탱하는 건 자기 뿌리를 향해 무너지는 앵두의 그림자들, 그림자들을 밟고 가는 맨발들, 맨발들 위로 다시 솟아난 종아리들, 끝이 뾰족한 풀잎들 누군가 밤새 파헤치다 만 앵두나무 뿌리를 들썩이며 나는 앵두를 물들이던 붉은 저녁에 대해 생각한다 대배우 마릴린 먼로 말고는 떠올릴 사람이 없다 오로지 붉은, 생각만으로도 출출하게 흘러내리는 봄날 더는 머물 수 없어 나는 어제 떠나지 못한 사람처럼 앵두나무 그늘에 서 있다 *시집/ 죄를 짓고 싶은 저녁/ 걷는사람 호젓한 구월 - 문신 석양의 호숫길을 걷는 동안 나는 무대에 오른 광대의 기분으로 웃었다 ..

한줄 詩 2022.09.01

공복 산책 - 조온윤

공복 산책 - 조온윤 걸어가야 할 마땅한 이유도 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하염없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 한가지 대답을 만나고 싶었지 이봐, 우리는 무엇으로 살고자 하는 거지? 깨달음을 얻고 싶었지만 글쎄, 이곳은 보리수 아래가 아니고 이곳은 사과나무 아래가 아니어서 사과가 내 발밑으로 떨어지지도 않았다 허기가 생각을 이길 때 나는 텅 빈 몸을 채우러 외출하고 있을 뿐이었다 거리에는 다만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걸어오는 사람들도 있었고 제 몸을 끊임없이 마르게 하는 것으로 싸움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보리수 대신 천막으로 그늘을 치고 그 아래 가부좌를 틀고 식도까지 탑을 쌓아 올리는 대식가들이 혁혁대며 먼저 수건을 던질 때까지 고작 허기 따위에 지고 싶지 않은 건가? 링 위에 선 깡마른 복서가 갈비뼈를..

한줄 詩 2022.09.01

비판 받을 권리 - 박용하

비판 받을 권리 - 박용하 나부터 선을 긋고 있다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 하는 아직도 안 되는 듣기 일가친척부터 위정자까지 주어 없는 고깃덩어리랑 묻지 마 투표기계까지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하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한다 종교는 말해 뭐하겠는가 유리 국경은 말해 뭐하겠는가 우리는 파편이다 그것도 끼리끼리 파편이다 이젠 이상하지도 않은 일이 되어 버렸지만 비판하는 자들이 비판받는 걸 더 못 견뎌 한다는 것이다 용기 내 들어야 할 쓴소리가 왔을 때 나는 누구였고 우리는 무엇이었던가 나부터 총을 들고 있다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아직도 요원한 듣기의 힘 비판할 자유가 있듯이 바판받을 자유도 있다 작가는 비판받을 권리도 있다 언어보다 총알이 편리한 이유다 비판하는 힘보다 ..

한줄 詩 2022.08.31

손수레가 할머니를 품고 - 배임호

손수레가 할머니를 품고 - 배임호 칼바람 몰아치는 꼭두새벽이다 구십도 허리 굽은 할머니가 너덜너덜한 손수레에 빈 박스를 차곡차곡 쌓고 어그적어그적 생의 길을 간다 보험도 눈길 한번 주지 않는 황혼 인생 온종일 품팔이 몫이 2천 원이란다 "자식들은요?" 한참을 가다가 뒤돌아보며 "즈들 날났데이" 한마디 툭 던지고는 어둠 속을 헤치며 간다 손수레가 할머니를 밀고 간다 저 양식을 구하는 빈자의 꼭두새벽에서 내 어머니를 만난다 *시집/ 우리는 다정히 무르익어 가겠지/ 꿈공장플러스 하나뿐인 명품 - 배임호 가정이건 직장이건 거리마다 다들 적(敵)을 두고 있다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막히는 일이 없어 희열이 넘칠 때나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우울할 때나 아무리 둘러봐도 종점에선 고독이 운명인 양 섬으로 서 있는 홀로이..

한줄 詩 2022.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