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적정 온도 - 조온윤

마루안 2022. 8. 11. 21:37

 

 

적정 온도 - 조온윤


주민센터에 왔어요
창구에서 나를 응대해준 공무원은
친절하지 않았지만
무례하지도 않았습니다

대기표를 들고 자리에 앉아 기다리는 내내
그들의 첫인사와 끝인사는 엇비슷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히 가세요

똑같은 표정과 말투로 서류를 건네고
다음 번호를 부르죠

전문 기구가 권장하는 겨울철 적정 온도는 이십도
겨울이면 이곳은 항상 적정 온도를 유지합니다

평온하다는 것, 지금 내 몸이 식어 있지도
뜨겁지도 않다는 것
손을 잡아도 느낄 수 없을 만큼
투명한 체온이라는 것

다음 사람을 위해 내가 앉은 자리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듯이
휴대전화를 보며 걸어오는 이를 피해
잠시 무해한 공기가 되어주듯이

오늘도 우리는 호의도 적의도 없이 안녕을 건넵니다

용무를 끝내고 가볍게 목례를 하고서
주민센터를 나왔습니다
바깥은 공기가 찼지만 바람은 불지 않았어요
저녁 약속은 없었고 이제 내가 할 일은 그들에게서
깨끗하게 지워지는 일뿐이었습니다

그런 날은 기억하기 어렵습니다
많은 날이 그런 날의 계속이지만요

안녕하기를
기억나지 않을 만큼 평온한 하루이기를
차례가 오지 않은 대기표를 주머니에 넣고
사라지는
투명한 인기척처럼

 

 

*시집/ 햇볕 쬐기/ 창비

 

 

 

 

 

 

더빙 - 조온윤


생각을 끄려고 음악을 틀었다

수요일인 줄로 알고 목요일을 보냈다

비가 온다는 걸 안 뒤에야 우산을 샀다

풍경이 나보다 먼저 흐르고
나는 몇걸음 뒤처져 따라갔다

늦은 나이에 외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내 안의 미움을 웃음으로 번역하는 매일매일

무슨 말을 하는데 자꾸만
모르는 목소리가 들려요

​세상과는 영 입 모양이 맞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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