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마지막 뒤풀이 - 박동민

마루안 2022. 8. 12. 21:46

 

 

마지막 뒤풀이 - 박동민


당신이 돌아왔다
눈먼 낙과가 붉은 지팡이로 공중을 지치며
빈 나뭇가지를 찾아가듯 얼어붙은 강을 건너왔다
첨탑의 뿌리가 손금처럼 뻗친 손바닥만 한 도시에서
갓 태어난 당신은 눈도 못 뜨고
좁고 긴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한 줌 석양을 마시고 있었다
창문과 창틀 사이에 낀 몇 가닥의 머리카락처럼
곱슬곱슬한 숨을 내쉬는 당신은
낯선 소도시의 거대한 요람인 광장에서
리아스식 발가락으로 붉은 파도를 타고 있었다
훌쩍 큰 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 돌아보았다
스무 살의 당신과 마흔 살의 내가 양끝을 붙잡고 돌리는
새하얀 줄 사이로 여든 살 당신이 일렁이고 있었다
몰려든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우리가 줄을 돌리고 넘고 타는 모습을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팔을 치켜들며 결승선을 통과한 마라토너처럼
어둠이 배를 깔며 바닥을 덮쳤고 우리는 손목을 놓쳤다
이별이 돌아왔다
당신은 떠났고 계속 떠나고 있다
뒤풀이가 끝난 뒤 비로소
뒤풀이가 시작되고 있었다

 

 

*시집/ 극지에서 살다 적도에서 만나/ 시산맥사

 

 

 

 

 

 

화성 버스 - 박동민

 

 

막차는 새끼손가락으로 여생의 시동을 걸었다

날숨은 엑셀 들숨은 브레이크

일생일대의 붉은 호흡을 동력으로

구불텅한 공중의 일방통행로를 자율주행 중이다

 

잠의 눈송이들이 전나무 가로수의 눈썹에 내려앉는다

그는 의자를 뒤로 젖히고 맑은 창문을 담는다

 

눈이 밝은 그는 감은 눈으로도

태양처럼 온 세상을 속속들이 밝히는 사람

눈이 맑은 그는 헤드램프를 쓴

광부처럼 내 앞길을 비추는 마지막 사람

 

오동잎만 한 한평생의 발자국들이 그를 뒤따르고 있다

발자국마다 심어 놓은 촛불을 꽃다발처럼 품에 안은 호위무사들

 

그들의 어깨를 밟고 올라 손망치로 창문을 깨부수려 해도

빙판만큼 단단한 그의 눈은 실금도 가지 않는다

 

나는 강보 같은 그의 품에서 처음처럼 울었다

그는 감잎만 한 내 이마를 짚으며

화성에서 처음 울 사람

 

이번 정류장은 노을이 파랗게 진다는 화성,

화성입니다

종점이니 아무도 내리지 마세요

뒤돌아보지도 마시고요

 

저상버스는 마침내 갓 돋운 봉분에 안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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