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합니다 - 이정록
제가 드려야 할 말이 아니라
제가 늘 들어야 할 말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언젠가 사용설명서까지 올 거라 믿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내 상처에만 필요한 약이라고 여겼습니다.
옹알이부터 시작한 최초의 말인 걸 잊어버리고
고쳐 쓴 유언장의 사라진 글자처럼 생각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건넨 흉터들,
그 바늘 자국을 이어보고야 알았습니다.
마중물을 들이켠 펌프처럼 숨이 턱, 막혀왔습니다.
기름에 튀긴 아이스크림처럼 당신의 차가움을 지키겠습니다.
빙하기에 갇힌 당신의 심장을 감싸겠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별자리처럼 아름다운 말이었습니다.
봉숭아 꽃물을 들인 새끼손톱 초승달에
신혼방을 차리자는 가슴 뛰는 말이었습니다.
당신을 당신 그대로 사랑합니다.
별자리와 구름의 이름도 바라보는 쪽에서
마음대로 이름 붙인 것이었습니다.
까치밥에겐 늦었다는 원망 따위는 없습니다.
당신의 부리가 아플까봐 햇살에 언 몸을 녹이던
까치밥이 바닥을 칩니다. 사랑합니다.
몸통 가득한 얼음을 녹여서
마중물을 들이켠 펌프처럼
숨이 퍽, 터졌습니다.
*시집/ 그럴 때가 있다/ 창비
팔순 - 이정록
기사 양반, 잘 지내셨남?
무릎 수술한 사이에
버스가 많이 컸네.
북망산보다 높구먼.
한참 만이유.
올해 연세가 어찌 되셨대유?
여드름이 거뭇거뭇 잘 익은 걸 보니께
서른은 넘었쥬?
운전대 놓고 점집 차려야겄네.
민증은 집에 두고 왔는디
골다공증이라도 보여줄까?
안 봐도 다 알유.
눈감아 드릴 테니께
오늘은 그냥 경로석에 앉어유.
성장판 수술했다맨서유.
등 뒤에 바짝
젊은 여자 앉히려는 수작이
꾼 중에서도 웃질이구먼.
오빠 후딱 달려.
인생 뭐 있슈?
다 짝 찾는 일이쥬.
달리다보면 금방 종점이유.
근디 내 나이 서른에
그 짝이 지나치게 연상 아녀?
사타구니에 숨긴 민증 좀 까봐.
거시기 골다공증인가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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