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늦여름, 와불 - 윤향기

늦여름, 와불 - 윤향기 이른 아침, 방충망 바깥은 타고 남은 진신사리 화장터 푸드득! 푸드득! 도주할 전도도 탈출구도 없이 죽음을 향해 비행 포스로 돌진한 열혈 사내의 최후는 차갑고 단단하다 무모하게 암술을 탐하느라 짧은 행성의 하루를 눈부신 불꽃에 후회 없이 던졌다 그는 한 생애의 남쪽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튼 것일까 북쪽을 향한 아미(蛾眉)의 남쪽은 어디일까 불에 탄 날개로 무릎 꿇은 불나방 말복 지나 추운 몸뚱이 하나가 와불로 누워 있다 *시집/ 순록 썰매를 탄 북극 여행자/ 천년의시작 서우(暑雨), 다크 투어 - 윤향기 후쿠오카 형무소 뒷담에 서시를 널어놓고 흐려지는 새들의 발자국을 널어놓고 자화상의 울음을 말린다 패 경 옥 기별을 개켜 놓은 제단에 긴 다리를 쭉 피며 눕는 백골 후두둑 빗방울이 ..

한줄 詩 2022.08.29

안부 총량의 법칙 - 성은주

안부 총량의 법칙 - 성은주 인사는 인사를 끌어당기고 입의 나라에서 덜 익은 안부가 오간다 가끔, 입의 나라에 끌려가 맛없는 음식을 함께 먹을 때가 있다 안녕은 안녕으로 둥둥 떠다니고 잘 지내는 잘 지내로 싱겁게 간을 맞춘다 괜찮아는 괜찮아로 딱딱하게 뭉친다 안부를 전할 때 내가 원하는 사람이 끌려오거나 끌려가거나 슬픔 없는 애도를 살그머니 내려놓고 뒤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가 하루에 쓸 안부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 안부가 길어지면 어려운 부탁이 따라온다 입에서 입으로 연주하듯 걸어 다닌다 안부가 빵처럼 부풀어 오른다 그럴 리가 없다는 그럴 리가 있다로, 잘 돼 간다는 잘 될 리 없다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마음에 드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목소리 치아 사이에 낀 음식물이 쉽게 빠지지 않는 것처럼..

한줄 詩 2022.08.29

그래도 우리는 - 변홍철

그래도 우리는 - 변홍철 역류성식도염, 불면증 치통과 가려움증, 몇 개의 중독 우울과 도착, 망상과 관음증들 그 얼굴이라고 해서 온기가 없으란 법은 없다 뻔뻔한 표정 뒤의 수치를 모를 리가 없다 괜찮다, 같이 살자 제자리를 지키며 이따금 서로 손등을 핥아주며 발바닥을 주물러주며 친구 몇은 더 데리고 와도 좋다 얇은 잔고를 아껴가며 밥을 나눠 먹자 내 남은 수명의 앞섶을 기꺼이 열어주마 그러니 지나가는 너희는 비웃지 말라 우리의 다정한 거처를 넘보니 말라 가령 내전의 검은 먼지가 나와 이 가련한 동거인들의 처마 위로 밀려올 때조차 발맞춘 행진곡과 폭죽 소리와 화약 냄새가 흰 구름의 커튼을 사납게 들출 때조차 여린 천의 바자울을 걷어차며 낡은 해와 죽은 별의 껍데기와 무딘 쇠붙이 신념들이 새겨진 깃발, 깃발..

한줄 詩 2022.08.28

처서 지나고 며칠 이따 - 한명희

처서 지나고 며칠 이따 - 한명희 시루떡 같은 바위가 부르르 몸을 떤다 안개가 단번에 걷히고 두 개 나이 든 여자의 젖가슴 같은 능선 앞에서 머리카락 쭈뼛, 선 나는 아내가 싸 준 도시락을 일 삼아 먹고 있었는데 가시 돋친 침엽수 사이로 솟은 해가 바위 밑에 연신 불을 지피고 있었다 또 어떤 날엔 바위가 공원 한쪽 부서진 짱돌처럼 날아다녀서 놀란 눈퉁이는 숨을 곳을 찾는 길고양이가 되고 발톱 빠진 발등은 끈 떨어진 신발 속에 젖어 있고 또 어떤 날은 도시락을 들고 출근하는 척 학교 가는 아이들과 현관문을 나서는데 옷 갈아입느라 두고 나온 해고통지서가 생각나서 처서 지나고 며칠 이따 고사떡을 돌리던 어머니의 손으로 아버지가 불이 나도록 뺨을 때리고 있었다 *시집/ 아껴 둔 잠 / 천년의시작 룰렛 - 한명희..

한줄 詩 2022.08.28

사라진다는 것은 - 부정일

사라진다는 것은 - 부정일 왕벚나무 잔가지 태우며 뭔가 태우기를 좋아하는 나는 전생에 숯쟁인지 도가의 화공인지 모른다 부서진 고가구 태우다 오늘도 이웃에게 핀잔을 듣는다 참나무 태워 숯을 만들듯 고승의 다비가 한 줌 사리를 만들듯 사라진다는 것은 또 다른 탄생을 의미할 수도 있어 밤하늘에 별이 긴 꼬리를 사선으로 남기며 사라져도 어딘가에선 또 다른 별이 탄생해 영롱하게 빛날지니 소멸은 아름다운 것 폐목이 노무의 언 손 녹이듯 누군가 의해 나 숯이 되리라 칠순 바라보는 나이에 마지막 불꽃 피워 훗날 누군가의 불씨가 될 수 있다면 나 그것으로 족하리라 *시집/ 멍/ 한그루 빈손 - 부정일 전봇대보다 더 커버린 아름드리 야자나무가 있다 중장비 없이 옮길 수도 없는 몇 해 전 이 집으로 이사 왔을 때 우듬지에 ..

한줄 詩 2022.08.27

폐막식 - 최백규

폐막식 - 최백규 집에 오면 죽을 마음이 사라져 있었다 집 안 가득 쌓인 그림자로 문을 막으면 여름이 온다 학기가 끝나버린 직후 네온사인이 늘어선 바닷가에 앉아 있었다 취한 채 갈비뼈에 손마디를 맞추다가 열이 들뜨도록 무더운 주말에는 열차가 한강의 어깨를 숨차게 쓸어내렸다 우리는 텐트에서 추운 지방의 만화책을 쌓아놓고 엎드려 있었다 나무들이 눈더미를 뒤척이는 소리를 읽으며 이마에 묻은 바람이 서녘으로 말라가고 있었다 물바닥에 어두운 여름이 일렁였다 밴드 동아리와 얽히며 그들의 몸에서 나뭇가지 냄새를 맡을 때 혹은 앰프를 연결해 종일 바닥을 차고 울려 퍼진다든가 멍청하게 포물선을 그리는 농구공을 바라보며 환하게 소리치고 새로 산 옷을 느슨하게 풀고 해변에서 폭죽을 터뜨리다가 입을 맞추었던 파도와 멀어져가던..

한줄 詩 2022.08.27

미안한 노동 - 이용훈

미안한 노동 - 이용훈 흙가마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불쏘기개로서 한낮의 대기를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를 불사르고 활활 타올랐던 사람들 새까맣게 타버린 몸을 이끌고 복도를 걷습니다 호이스트 승강기 안에서 화강석을 들고 있는 당신을 생각합니다 21층으로 아니면 더 높이 올라가는 덜컹덜컹 무심하게 올라가는 동안 오로지 당신이 들어갈 곳의 크기와 오차 치수만을 고민하는 당신의 몸이 적당한 크기로 절단되고 무탈하게 놓이기만을 바랄지도 모르겠습니다 후끈한 열기가 응어리져 있습니다 나이지리아 사람 몽고 사람 때로는 동양 라이트급 챔피언으로 무리 지어 어두컴컴한 모텔 복도를 이리저리 걷습니다 당신들은 타월을 충분히 달라는 요구도 시원한 물이 냉장고에 준비되어 있는지도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합니다 세워지는 모든 존재들은 ..

한줄 詩 2022.08.26

사랑한 만큼 보여요 - 박노해

사랑한 만큼 보여요 - 박노해 사람은 그래요 모든 면에서 좋은 사람이기 불가능한 것처럼 모든 면에서 나쁜 사람이기도 불가능하죠 사람은 그래요 모든 점에서 훌륭하기 힘든 것처럼 모든 점에서 형편없기도 힘들지요 사람은 그래요 인생 내내 잘나가기 어려운 것처럼 인생 내내 헤매기도 정말 어렵지요 사람은 고정체가 아닌 생성체이니까요 지금 여기서 보는 그가 아니라 그의 전체를 보아야만 그가 보이지요 사람은, 사랑하면 보이지요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 만큼 보이는 것이지요 *시집/ 너의 하늘을 보아/ 느린걸음 다 공짜다 - 박노해 세상에 공짜가 어딨냐고 힘주어 말하는 자들은 똑똑한 바보들이다 인생에서 정말로 좋은 것은 다 공짜다 아침 햇살도 푸른 하늘도 맑은 공기도 숲길을 걷는 것도 아장아장 아이들 뛰노..

한줄 詩 2022.08.26

밤은 불안해서 - 류흔

밤은 불안해서 - 류흔 낮에 관해서는 나는 거의 감동이 없고 방관하는데, 다만 나는 나의 밤을 괴롭힌다 창문을 열면 문틀에 앉아있는 달빛과 가파르게 넘나드는 바람에게 무언가 연신 묻고 대답을 듣기도 전에 끄떡인다 건넌방에는 아내가 이불을 걷어찬 채 가릉 가릉거리며 잠들어있다 반면에 나의 애인들은 전부 잠 못 들고 내가 유부남인 사실에 몹시 불안할 테지 불안해하다 화가 날 거야 그녀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스크럼을 짜서 나를 손봐주러 맹렬히 돌진한다, 이것은 어젯밤 내가 꾼 꿈 오늘은 밤을 대하는 태도가 신중하니 그런 흉몽은 없어야 한다 다시 그런 꿈을 꾼다면 11층에서 완강기를 타고 바닥으로 내려갈 것이다, 이것은 절대로 농담이 아니다 *시집/ 지금은 애인들을 발표할 때/ 달아실 어느 때에는 - 류흔 또..

한줄 詩 2022.08.25

처서 뒤 나그네들 - 홍신선

처서 뒤 나그네들 - 홍신선 영락없이 일모도원(日暮途遠) 황망한 나그네의 몰골이다. 처서 지나 뭇풀들이 색을 바꾼 궂은 잎 몇몇 매달고 갓 난 몸 겨드랑이에다 손톱만 한 꽃을 감추거나 이삭들 목을 뽑아 올린다. 이 얼마나 앙증맞은 절망의 기색들인지. 아니다. 이 얼마나 번식욕이 마려운 진지한 얼굴들인지. 차마 저들을 어찌할 수 없어 나는 왼종일 터앝에 와서 귀청 해진 내 귓때기나 내려놓는다 가승(家乘)에 무후(無後)다란 기록 한 줄 지우고 뭉개기 위해 인간도 생명에 된힘에 된힘을 더하지 않는가. 목숨붙이들 누구나 뒷날 세대를 노둣돌 삼아 시간의 텅 빈 통로를 뚜벅뚜벅 걷거나 건너뛰어 영원에 당도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 무한 미래를 위해 영근 종자들 속 어딘가 오고 있는 풋내기 나그네들 발소리를 오늘은 이..

한줄 詩 2022.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