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느 날 벼랑이 - 이은심

마루안 2021. 9. 11. 21:46

 

 

어느 날 벼랑이 - 이은심

 

 

우리가 서로 바라보기만 하다가 외지고 혹독해진다면 저 높이는 흉측한 돌일 뿐이지 거기서

우리 중 한 사람이 몹시 울어야 한다면 천 길 깊이는 나쁜 신념일 뿐이지

 

제발 희생을 실천해주세요

아찔함을 뛰어내려주세요

 

불처럼 단단한 눈물이 되어볼 걸

해뜨기 전에 길을 나선 내상(內傷)이 피운 우리는 문득

몰매처럼 서러운 불안의 아들딸

 

그러므로 그래서는 안 되는 이번 생의 경사는 낡은 슬리퍼처럼 헐떡이지

우리를 보다가 우리만 보다가 아무 데나 침을 뱉는 잠깐의 미망이

닿지 않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꽃, 꽃을 지켜보는 난폭

 

여긴 뜨겁고 좁은 맹지가 될까

 

우리 몰래 갈라 터진 몸을 실천해주세요

헛꽃의 걸음이 더딘들 멈추지 말아 주세요 아래로 아래로 자라는 우린 방자한 기백인 걸요

 

아슬하고 비범한

 

 

*시집/ 아프게 읽지 못했으니 문맹입니다/ 상상인

 

 

 

 

 

 

노크 없이 - 이은심


독한 에스프레소에 아는 神의 이름을 섞어 마신 건 말하지 않는다 헤어드라이어로 젖은 눈물을 말린 건 말하지 않는다

조용조용, 조용은 소리가 너무 커

아무도 살지 않는 외딴 머리맡
착한 죄를 소독하고 그러다 맑아져서 산소처럼 병색을 잊을까 쇠락한 손톱을 나지막이 다듬고

연한 살을 골라 우뚝해지는 검은 글씨의 흘러내림, 집요하게 목만 내밀고 있는 물병과 일인식사환영 같은
슬픔 이하가 다 젖도록 신발을 가지런히 놓고

아픈 사람은 반드시 흰 벽 사이에 있다는 건 말하지 않는다 반쯤 열린 문으로 통증이 들것을 타고 온다는 것도

우리 중 하나가 창 앞에 서 있기 위하여 노크도 없이 날카로운 소식이 성큼성큼 닥치고 그래야 아플 수 있는 병을 반듯하게 펴서 눕힐 때

응급은 수많은 한 번으로 몰래 뺨을 닦는다는 건 말하지 않는다


 

 

*시인의 말

 

내 인생의 아픈 쪽을 비워두니 돌아갈 집이 없는 바람과 새가 멸망처럼 울고 간다

나는 그 동선을 따라가 빛으로 빛을 문질러 다시 울게 할 뿐이다

 

이 작은 생이 오류라면 인간의 높이를 따돌릴 수 있다고 해두자

허나,

동냥젖으로 키운 내 어린것들에 무거운 붓을 맨 혐의는 지금 선 이곳에서 고스란하다

 

신을 만나는 밤이 더 있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