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노량진 사는 행복한 사내 - 홍성식

마루안 2021. 9. 11. 21:53

 

 

노량진 사는 행복한 사내 - 홍성식

 

 

강에서 바닷고기의 비린내가 온다

 

어둠 깔리는 수산시장이

생선의 배를 갈라 새끼의 배를 불리는

사내들 악다구니로 끓는다

 

보기에도 현란한 사시미칼 서슬 아래

펄떡이는 생명 내장 쏟으며 쓰러지지만

서른아홉 대머리 박씨에겐 죄가 없고

죄 없으니 은나라 주왕도 안 무섭다

 

허풍과 농지거리 섞어

서푼짜리 생 헐값 떨이에 거래하는

고무장화의 거친 사내들

파르르 떨어대는 넙치 아가미에선

'과르니에리 델 제수' 소리가 난다

 

그래, 오늘만 같다면

이번 달 딸아이 레슨비는 걱정 턴다

새까만 박씨 낯짝

전갱이 굵은 비늘이 빛난다.

 

 

*시집/ 출생의 비밀/ 도서출판 b

 

 

 

 

 

 

대게잡이 선원 철구 씨 - 홍성식

 

 

당 45세 철구 씨는 우즈베키스탄으로 간다

여기서 구하지 못한 아내 거기라고 쉬이 찾아질까

 

성질 마른 철구 씨, 고등학교 1학년 때

거들먹거리는 선배 둘의 코뼈를 내려 앉히고

머리통 쥐어박히며 아버지와 함께 대게잡이 배를 탔다

바닷바람은 매웠고 손등은 갈라 터졌다

그러나, 정직한 노동은 정직한 돈을 가져다주고

 

솜털 같은 턱밑 수염이 어느새 억세진 서른여덟

포항운하가 내려다뵈는 아파트의 주인이 됐다

영어로 제 이름을 쓰지 못하는 철구 씨

'세진 베르체'라 적힌 제 집의 스펠링도 뜻도 모른다

 

여자라곤 꼭지 돌게 술 마신 날 만난 중앙대학 창녀 몇

강원도 철원 군대생활을 거치며 교접한 작부 몇이 전부

흑룡강성 목단강시에서 왔다는 구룡포다방 여자는 곰살 맞았다

살 부비며 산다는 게 이런 거구나, 철구 씨는 매일 웃었다

조선족 취향으로 빚은 커다란 만두와 독한 고량주가 달았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흑룡강성 물길을 발가벗겼다

 

예기치 않은 겨울 태풍에 조업은 난항을 겪었다

예정된 3박 4일을 하루 넘겨 아파트 현관문을 열었다

손에는 목단강 여자가 좋아하는 매운 돼지찜을 들고

없었다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다

홈플러스에서 산 싸구려 중국산 헤어드라이기까지 사라졌다

며칠을 주저앉아 제 잘못을 떠올리고자 했다

그러나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통장과 도장 없이 잔고를 확인하려던 철구 씨

은행 여직원은 위아래를 훑으며 경비원에게 눈짓을 보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여자가 명의를 바꾸자 졸라대던 '세진 베르체'를 지킨 것은

칠순 노모는 같이 울었고

팔순 아비는 돌아서 내처 줄담배를 피웠다

열일곱 그때 그랬듯 철구 씨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그리곤, 우즈베키스탄행 왕복 비행기표를 내던졌다

 

홀로 중앙아시아 사막을 내려다보며 돌아오는 길

비행기 창은 왜 이리 좁디좁은 것이냐

공짜 위스키에 취한 철구 씨는 울컥 눈물을 쏟았다

폭풍에 흔들리는 30톤급 주먹만 한 배 위

백척간두 목숨 앞에서도 보인 적 없는 눈물이었다.

 

 

 

 

# 홍성식 시인은 1971년 부산 출생으로 광주에서 청춘의 한 시절을 보냈다. 2003년 <시경>으로 등단했다. 몇 곳의 신문사를 옮겨 다니며 20년 가까이 기자로 일하고 있다. 시집으로 <아버지꽃>, <출생의 비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