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오래 병에 정들다 보니 - 손진은

마루안 2021. 9. 28. 22:08

 

 

오래 병에 정들다 보니 - 손진은


오래 병에 정들다 보니 알겠다
병에도 위계가 있다는 걸
사막의 사자처럼 센 놈이 늑골언덕 깊숙이 사무치면
위아래서 빼꼼히 얼굴 내밀던 치들은
얼른 엎드린다는 걸
그러다 그 정든 병 유순해질 즈음이면
꼬리뼈에 핏줄에 마음의 살들에 숨어 살던
밀사들 얼른 고갤 들어 세력 다툰다는 걸
때로 다른 불우의 습격에 스러져 간 놈들,
내 영토는 버려진 마음들과 병이 암수가 되어
식구를 들이고 곁에 눕고 몸을 내줬다는 걸
지금도 엑스레이를 보면
내 몸의 왕국 점령하고 나부끼며 쇠락해 갔던,
때로 통보도 없이 왔다 간 환후의 연혁 아련히 남아 있다는 걸
그런 줄도 모르고 많은 미망과 헛것에 골몰했던 불모의 영지에
파란만장 술과 국밥, 울음과 다정 흘려보냈던 목구멍의 뻔뻔함!
오오래 병과 뱃동서 하다 보니 알겠다
비 온 후 공터에 키를 늘이던 잡초의 생몰처럼
내 영토에 머물다간 그들 잘 건사하지 못했던 불우가
지난 왕국의 역사였다는 걸


*시집/ 그 눈들을 밤의 창이라 부른다/ 걷는사람

 

 

 

 

 

허기 충전 - 손진은


수년째 성업 중인,
그 묘한 허기가 떠오를 때마다 가는
밥집이 내 일터 가까운 곳에 있다

'허기 충전'이란 상호를 내건
저 카운터의 흰머리 사낸 알고 있다는 걸까
한 끼의 식사 같은 거로는
원기가 충전되지 않는다는 걸
아니 충전된 허기가 더 검게 빛난다는 걸

밤새 달빛이 어루만지다 간 알 같은
부화를 기다리는
둥근 지붕의 저 식당에는

아닌 게 아니라
펄럭이던 검정 비닐에 구멍 뚫어
마늘을 심던 벌건 얼굴들의 담배 연기와
인근 공사장 인부들 발꼬랑내 나는 군화와
막걸릴 마시다 시비가 붙어
막 씩씩거리는 짧은 머리의 롱 패딩들

허기의 사촌쯤인 불만과
불만의 양아들뻘인 분노와 상처들이
연탄난로 위 주전자가 흘린 물방울처럼
따그르르, 츠잇츠잇 굴러다닌다

삶에 대한 계획 같은 건 아예 없는,
성실한 것이 아름답다고만 믿지 않는 눈빛의,
부시지 않는 빛을 두르고 있는,
음지식물 같은

저들은
먹을수록 충전되는 단단한 허기
맷집처럼 키우러 집요하게
소슬한 저녁들을 찾아오는 게 틀림없다

 

 

 

# 손진은 시인은 1960년 경북 안강 출생으로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1995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이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다>, <고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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