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봄볕이 짧다 - 김영진

마루안 2021. 9. 28. 22:00

 

 

봄볕이 짧다 - 김영진


눈동자 스민 황달 이제 얼굴 덮쳤다

예순넷까지 삶 언덕 가팔랐고 병원 중환자실로 실려오기 전날까지 자활 공공근로로 쓰레기 치웠다

외래진료 받아도 출근 거른 적 없던 분

댁을 찾아가 이층 단칸방 문 두드렸다

홀로 조용히 떠나도록 한사코 가만 두라 했으나 방 안에 그냥 둘 수 없어 구급차 불렀다

병실 유리창으로 달려드는 봄볕, 기운 없는 손을 잡고 이마 머리카락 넘겨드린다

혼자 살아오신 삶, 유일하게 연락 닿는 남동생에게 알리지 말라 부탁하셨지만 그 말씀 들어드릴 수 없었다

기운 내세요 이겨 내셔야죠 물으니 아주머니 샛노랗게 웃으신다

병실 비춘 봄볕이 짧다


*시집/ 영구임대아파트 입주 문의/ 문학의전당

 

 

 

 

 

철근 인생 - 김영진


어릴 적 넝마 덮고 자란 그이 뼈마디는 철근마냥 굵고 단단하다

콘크리트처럼 딱딱하게 굳은 등

문맹인 그에게 술은 말의 시작, 신청서 쓰는 일도 남의 손 빌려야 했다

막걸리 마셨나 보다 낯빛이 흙빛으로 변했다

"목숨 끊지 못해 오늘도 찾아왔다"로 시작한 술주정, 그의 목에서 이따금 쇳소리가 섞여 나왔다

행정복지센터에 가득 찬 술 냄새

소파에 드러누워 누군가에게 말하듯 읆조리더니 오래 지나지 않아 잠이 들었다

철근 옮기고 공중에 매달려 철사 조이는 일은 아내와 아들 딸마저 사고로 떠난 그의 삶보다 아슬아슬하지 않다

술기운 빌러 기초연금 신청하러 온 그는 쇠보다 강한 자존심 바닥에 내려놓았다

 

 

 

 

# 김영진 시인은 1973년 전남 화순 출생으로 2017년 계간 <시와사람>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현재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다. <공무원노동문학상>을 수상했다. <영구임대아파트 입주 문의>가 첫 시집이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러니까 내 말은 - 김상출  (0) 2021.09.29
오래 병에 정들다 보니 - 손진은  (0) 2021.09.28
한낮 - 육근상  (0) 2021.09.27
먼저 된 사람 - 김한규  (0) 2021.09.27
마스크에 쓴 시 4 - 김선우  (0) 2021.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