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마스크에 쓴 시 4 - 김선우

마루안 2021. 9. 27. 21:27

 

 

마스크에 쓴 시 4 - 김선우


두껍습니다
이 밤은 유독
내 몫이 아니었던 생들이 무더기로 돋아 방 한칸의 벽을 이룬 듯한 이 밤은

뚫고 나가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우리라 부를 수밖에 없는 우리여

우리는 일상을 회복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일상은
폭력없이 평화로웠나요?
차별없이 따뜻했나요?
아이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너희가 어른이 되면"이라고 말할 수 있었나요?
우리 손으로 미래를 목 조르고 있지는 않았나요?

내 손이 판 무덤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시집/ 내 따스한 유령들/ 창비

 

 

 

 

 

 

마스크에 쓴 시 13 - 김선우

 

 

1

어쩔 수 없이 빌린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빌려 쓸 수밖에 없는데 돌려줄 수 없어서

존재의 슬픔이라고 느끼게 되는 것들이.

 

실은,

함부로 빼앗은 것들이 더 많습니다.

 

이해를 구하지만 이해될까요? 내가 그라면

용서를 구하지만 용서될까요? 우리가 그들이라면

 

2

존재의 벼랑 앞에

한줄의 시로 부끄럽게 엎드린 마음이

오늘이라면

 

내일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여전히 합니다

 

지금도 태어나는 인간의 아이들이 있고

자라나는 어린 인간들이 있는데

절망을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어디서부터 흔들려야 할까요?

세계가 이 지경이 되도록 저지르며 살아온 어른 인간들이

부끄러움에 관해 생각하는 마음의 저녁,

거기부터일까요?

 

 

 

 

# 김선우 시인은 1970년 강원도 강릉 출생으로 강원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96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도화 아래 잠들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녹턴>, <내 따스한 유령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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