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지는 저녁 속으로 홀로 떠미는 - 안태현

마루안 2021. 10. 5. 22:19

 

 

지는 저녁 속으로 홀로 떠미는 - 안태현


어두운 새 한 마리가
다시 돌아와 앉은 그 자리를 바라보는 일이 좋다

저녁 빛에 쌀을 씻어 안치고
오이냉국에 얼음 몇 조각을 띄워 휘휘 젓다 보면
생각 끝에 당신이 있다

가뭄에 논물을 끌어다 쓰듯
몇 번은 사정해서
옛일을 불러다 내 앞에 앉히곤 하는데

그저 지나가서 아쉽던 저녁처럼 몸이 뜨겁던 시절이 당신에게도 얼마쯤 있었으면 하는 게 
내 속마음이다

시절과 시절 사이 내게 오는 아픔은
모든 것을 이해만 시키려 드는데

지는 저녁 속으로 홀로 떠미는 손들이
그 틈을 타서
솔기 터진 내 마음 어딘가를 툭 건드린다

돌확 같은 당신을 돌아와 고요히 고이는
수척한 밥 한술이란

 

 

*시집/ 최근에도 나는 사람이다/ 상상인

 

 

 

 

 

 

생활의 목록 - 안태현


고장 난 보일러를 고쳐서
뜨거운 물이 쏟아지니 마음이 놓인다
고추를 따다가 물것들에게 물린 자리들이 가렵기는 하나
긁지만 않으면 가라앉을 것이다
구석마다 거미들이 집을 짓고 있는 것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으나
빨랫감을 모아 두었다 한 번에 해치우는 개운한 일도 있다
바람에 찢어진 상수리나무 가지를 치우는 일도
손이 많이 가는 일은 아니다
드라마 속에서 계속 울고 있는 여주인공이 있다면
그건 드라마가 계속된다는 뜻이고
두꺼운 이불을 내어 한기를 덮는 나는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다
매번 같은 질문을 받지만 매번 다른 답을 해야 하는 
나의 최선은 무엇인가
턱걸이 일곱 개와 팔굽혀펴기 스무 개를
하루치 건강 식량으로 삼고
나직나직 말을 걸어오는 고샅길을 걷는 것도 간식이 되었다 
무인칭에 기대고 사는 이런 것들이
나의 한 생으로 엮어지는 것이리라
이제 제법 피가 돈다

 

 

 

 

# 안태현 시인은 전남 함평 출생으로 2011년 <시안>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이달의 신간>, <저녁 무렵에 모자 달래기>, <최근에도 나는 사람이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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