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내게도 용 문신을 새기는 밤이 오리라 - 김왕노

마루안 2021. 9. 30. 22:25

 

 

내게도 용 문신을 새기는 밤이 오리라 - 김왕노


​오래된 TV 드라마 한 장면에서
한밤중에 마당에서 줄넘기를 하자 뭐 하느냐고 물으니
고독에 몸부림친다 해서 웃은 적이 있다.
그때 웃을 일이 아니었고 지금 나도 고독해졌다.
친구와 휩쓸려 1차 2차 술자리를 하다가 3차 노래방에서
그 겨울의 아침을 부르고 장밋빛 스카프를 부르던 날이 꿈이었나 싶다.
스마트 폰의 많은 연락처 중에 선뜻 눌러야 할 이름이 없다.
이렇게 고독한 날은
화투 패를 뜨거나 전신에 문신을 새기고 싶다.

​몸을 화판으로 더 이상 고독하지 말라고
나와 함께 살아갈 문신을 새기는 것
깍두기처럼 가끔 어깨에 힘을 넣고 꿈틀거리는 문신을 과시하는 것
닭 피로 문신을 새기면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순하게 느끼도록 사군자를 새기든지 풀꽃을 새겨도 좋지만
용 문신을 새기고 싶다.
천지를 우레로 뒤흔드는 용, 여의주를 물고 청동의 몸을 꿈틀대며
어둠에 불의 칼을 휘두르듯 일 획을 그으며
끝없이 승천하는 용꿈을 꾸고 싶어

​머지않아 용이 내 몸에서 벼락 치듯 날 것이다.
내 몸은 용의 터전, 나를 박차고 용이 치솟는 날을 기다리다 보면
내 고독도 용꿈에 밀려 사라질 것이므로
앞으로 용 문신 새길 몸을 피가 나도록 박박 문지른다.
용이 나를 낚아채 하늘로 오르다가 떨어뜨리는
악몽을 꾸더라도 고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므로 이 모든 것을 견디며 기다리리라.


다시 단언하지만 내게도 용 문신을 새기는 밤이 오리라.

 

 

*시집/ 도대체 이 안개들이란/ 천년의시작

 

 

 

 

 

 

꽃에게 - 김왕노

 

 

네가 그곳에 지고지순하게 피어났다는 것은
네게 파란만장이 있었다는 것, 엄동을 건넜다는 것
네가 피니 갈채와 감탄을 보내지만 네가 피기 전까지
겨울을 건너와 눈물에 뿌리 담그고
눈물의 힘으로 분열과 분열을 거듭해 피어났다는 것
어둠을 초월해 눈물 같은 이슬이 맺혀 피었다는 것
엄연히 꽃이 피었다는 말은
반드시 진다는 어두운 미래란 말도 되지만
네 뼈 마디마디마다 아리는 파란만장이 있었다는 것
내가 여기까지 온 것도 파란만장이 밀었다는 것

 

 

 

 

# 김왕노 시인은 1957년 경북 포항 출생으로 199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슬픔도 진화한다>, <말달리자 아버지>, <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그리운 파란만장>, <아직도 그리움을 하십니까>,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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