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빈 구두와 날짜들 - 이자규

마루안 2021. 10. 5. 22:10

 

 

빈 구두와 날짜들 - 이자규

 

 

시간을 분리하다 발판을 분리하다 그림자도 따라 갔다

움푹 들어간 날짜가 제거되고 신경선을 걷었다

비는 내리고

스쳤던 등받이에 닳아빠진 낱말들

흰 유니폼들이 인공 웃음으로 지나가고

비바람은 사선이다

금속성 데이트를 등으로 새겨야 했기에

바퀴를 뜯어내는 기억을 붉은 녹이 말했다

 

날것들이 눈꺼풀에 날아들었다

빈 구두와 빈 모자 그리고

미소가 필수인 종양실과 바흐가 흐르는 채혈실

붉은 장미가 각혈을 부풀렸다

방천 둑 쇠비름 따위나 되어 꽉꽉 밟히고 싶은

불면 한쪽을 난도질로 쥐어뜯는다면

단풍잎 울음은 어느 휠체어에 앉히나

하늘이 낮아졌다 '당신이 밀고 내가 앉고 싶어' 내 말에

'여기까지 내 그릇인가 봐'

우북이 쌓인 말들만 난무했다

 

 

*시집/ 아득한 바다, 한때/ 학이사

 

 

 

 

 

 

허 씨는 매일매일 - 이자규

 

 

빈 박스를 접어 리어카에 집 한 채 짓고 있다

움직여야 산다는 진단을 받았다는 허 씨

초저녁잠과 새벽별이 삶의 공식이다

 

힘센 걸로 네모 기둥을 세우는 건 마음의 골조를 다진다는 뜻

한 치의 틈도 없이 다짐을 쟁여나간다

도매시장의 연대기적 시간에서 쏟아진 허 씨의 희망들

발바닥에 땀이 나고 새벽 국밥이 달다

 

둥근 지붕이 둥근 결기로 완성되어 가면

가로수 이파리를 사운거리는 인사로 푸르러지는 가슴이라 했다

 

그가 말하는 잉여인생이라면 지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기초 다져 석 자 높이까지 올린 지붕이 그의 팔뚝 근육이다

둥근 바퀴가 지그재그 방법으로 천천히 골목을 기어나간다

사람이 사람을 맞을 때 턱의 각도를 낮추듯

수레 앞쪽을 낮추어 넒게 무게 실으면 다음 보폭이 수월해진다는 것

 

경사졌던 허 씨의 길 일흔일곱 수레바퀴 길

지폐보다 높은 자기장이 허 씨를 모시고 간다

 

 

 

 

# 이자규 시인은 경남 하동 출생으로 2001년 <시안>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우물 치는 여자>, <돌과 나비>, <아득한 바다, 한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