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숨 - 김윤환
아침을 거르고
점심을 건너뛰고
저녁에는 그냥 잤다는
그녀에게
먹고 사는 것이
죄가 될 리 있겠냐만
일 때문에 밥을 거르는 일이나
밥 때문에 숨을 거르는 일은
자기에게 죄를 짓는 일
이라고 말하고는
나도 식은 밥 한 숟가락을 뜬다
찬밥이 목구멍에 넘어갈 무렵
묵은 한숨이 가슴에 얹혔고
마음속에는
긴 괘종소리가 울렸다
밥과 숨을 함께 쉬는
일없는 하오(下午)를
나도 그리워했다
*시집/ 내가 누군가를 지우는 동안/ 모악
발인(發靷) - 김윤환
이별은 잔치 후 정리되지 않는 주방 같은 것
쌓인 그릇과 남은 음식물에 묻은 소음
물린 채 풀리지 않는 나사들
울음이 벼루에 녹은 먹이 되어
폭과 너비를 알 수 없는 어둠을 그리는데
발은 바닥에 닿지 않고
손은 하늘에 닿지 않아
만질 수 없는 얼굴이
비가 되어 내리는 것, 내 안에 고이는 것
떠난 이의 얼굴에 내가 비치는
낯선 거울이 보이는 시간
누군가의 손이 필요한 순간이었네
떠나보낸다는 것은
이 강과 저 강 사이
질기고도 투명한 다리 위에
목청껏 부르지 않아도
이내 목이 잠기는 노래였고
끝내 놓을 수 없는
동아줄 같은 것이었네
# 김윤환 시인은 1963년 경북 안동 출생으로 1989년 <실천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그릇에 대한 기억>, <까티뿌난에서 만난 예수>, <이름의 풍장>, <내가 누군가를 지우는 동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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