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힌 후 - 박남원
비수처럼 비끼는 말들과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사람들의 생각이 한없이 차고 낯설 때
사랑조차 마음 같지 않아 안개 낀 들녘에 홀로 떠돌 때
비에 젖은 자작나무 숲길을 걸어
소리 없이 나는 그곳으로 떠나자.
언젠가 세월도 다 지나고
그 많던 상처도 꽃처럼 지고
사람들에게 잊힐 것 다 잊힌 후
어느 한적한 시골, 바람에 갈잎 흩어지는 외진 마을의 한 흙집, 그 안에
그동안 까맣게 잊혔던 나는
오래전에 그곳에 들어가 있자.
그러다가 어느 날 우연히 마당 앞을 지나는
한 여자의 눈동자에 이슬처럼 잠시 머물렀다가
길고 어두운 시간을 되돌아온 연어 같은,
그 오래된 기억의 기척에 문득 이끌려
지나던 발걸음 잠시 머뭇거리게 하는
이왕이면 지친 다리와 힘겨웠던 기억, 외로웠던 가슴도 조금 적셔주는
한 모금의 바람이 되어
그곳에 있자.
*시집/ 사랑했지만 어쩔 수 없었던 어느 날/ 도서출판 b
당신을 사랑했지만 어쩔 수 없었던 그런 어느 날 - 박남원
수많은 사람이 있었으나
정작 당신이 없어 허전했던
수많은 사람을 만날 수는 있었으나
정작 당신을 만날 수 없어 쓸쓸했던
그런 날 비로소 당신이
조금 왔습니다,
당신 아닌,
실은 당신보다 더 당신이
강물 위에 노을이 되어 떠 흘렀습니다.
*시인의 말
(.....)
크고 작은 삶의 우여곡절들이 시집 한 권 낼 여유조차 없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렇더라도 누더기가 몸을 떠나지 못하듯 시가 내게 그랬다.
돌이켜보면 시가 물질적으로 가져다준 것은 없었지만 싫든 좋든 여기 담겨 있는 시들은 어쩔 수 없이 내 삶이고 나로서는 누가 뭐래도 소중한 정신적 분신들이다.
갈수록 세상이 힘들어지는 것 같다.
산하나 넘으면 더 높고 험한 산과 마주하게 되는 이 쓸쓸하고 어려운 세상에 시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뭐가 있겠는가. 외롭고 힘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이 시집이 조그마한 위로라도 줄 수 있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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