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오후의 느낌과 여행을 떠나자 - 임곤택

마루안 2021. 10. 3. 19:27

 

 

오후의 느낌과 여행을 떠나자 - 임곤택

 

 

이렇게라도 바람이 불고 한 대씩

자동차 지나가고

늙은 여자는 애초부터 늙도록 되어 있어서

더 예쁜 것을 얻어서

딸을 얻은 사람은 그렇게 행복해져서

 

살아 있어서 참 좋은 오후

두 사람이 탄 오토바이

앞사람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싼다

셋이 탄 자동차는 바퀴가 넷

등에는 배낭이 있고

 

이런 꿈을 꾼다

좋은 오후와는 어떻게든 늦게 만나서

채소를 함께 다듬고

반쯤 죽은 것에 물을 뿌려 반쯤 살리고

게으른 아이는 그냥 놔두면 된다

 

되도록 멀리 가기로 하였다

비가 예보되었다

가방에는 더 많은 자랑과 남는 식욕

뒤에 앉은 사람이 손가락 뻗어

저 앞을 가리킨다

 

둘인 듯 셋인 듯 그 이상인 듯

주머니엔 숟가락 하나씩

모처럼 하루가 빼곡히 채워지는 날

어쩌나, 그치기 싫다

 

 

*시집/ 죄 없이 다음 없이/ 걷는사람

 

 

 

 

 

 

그럴 수 있지만 - 임곤택

 

 

23시 17분

 

달의 지름을 서너 배 늘인 옆에는 흐린 날에만 보이는 노란 별이 있다. 그 별은 버스가 만들어지기 전에, 우리가 두 발로 걷기 전부터 빛을 보냈다. 우리가 보지 않는 동안에도

달린 별빛은 밤이 되어서야 우리에게 닿는다.

 

버스기사는 같은 길을 여러 번 오간다.

한 사람을 두 번 태울 수 있고

그때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할 수 있지만

 

23시 08분

파충류 판매점은 불이 꺼졌다.

뱀들은 서로 몸을 얽고 잠들었을 것이며

마음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지만

 

지나가는 것은 몇 번 더 지나간다

23시 03분

가로수는 활엽수가 많다

별의 일생이 끝나면 몇 억 년이 지나서야 우리는

별 하나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승객들 숫자는 어제보다 적다

23시 02분

말은 없고 웃지 않으며

 

 

 

 

# 임곤택 시인은 전남 나주 출생으로 2004년 <불교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지상의 하루>, <너는 나와 모르는 저녁>, <죄 없이 다음 없이>가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잊힌 후 - 박남원  (0) 2021.10.04
내 슬픔에 수저를 얹고 - 이은심  (0) 2021.10.04
밥숨 - 김윤환  (0) 2021.10.03
다인실 다인꿈 - 신용목  (0) 2021.10.01
종착역 근처 - 최영철  (0) 2021.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