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를 씻다 - 조인선 귀를 씻다 - 조인선 좁은 접시에 생선 살 바르듯 이력서 한 칸 한 줄에 적어나가면 고작해야 몇 줄인 생이 새로운 건 그만큼 단순하다는 것이다 몇 년의 행적이 한 줄로 줄어드는 게 덧없는 게 아니라 순간의 모습이 빈칸에 달라붙는 게 간절함이 아니라 생의 전부마저 한 장에 여백을 주.. 한줄 詩 2015.01.27
불편한 죽음 - 이성목 불편한 죽음 - 이성목 추운 날 땔감으로 쓸까하여 공사장 폐목자재를 얻어다 부렸더니 온통 못투성이다 하필이면 나무에 빠져 죽었을까 죽은 못을 수습하는 동안 나무의 꺼칠한 잔등에 긁힌 자국이 소금쟁이 같다 죽은 것들을 위하여 겹겹의 나이테를 다 퍼낼 수 없어 아궁이 밑불을 뒤.. 한줄 詩 2015.01.27
산에 사는 날에 - 조오현 산에 사는 날에 - 조오현 나이는 뉘엿뉘엿한 해가 되었고 생각도 구부러진 등골뼈로 다 드러났으니 오늘은 젖비듬히 선 등걸을 짚어 본다 그제는 한천사 한천스님을 찾아가서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물어 보았다 말로는 말 다할 수 없으니 운판 한번 쳐보라, 했다. 이제는 정말이지 산에 .. 한줄 詩 2015.01.26
연명치료 중단을 告함 - 김연종 연명치료 중단을 告함 - 김연종 나는 죽음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다 목숨을 담보로 삶의 고통을 덜어내고자 함도 아니다 그저 마지막 길을 당당하게 걷고자 함이다 이제 모니터로는 남은 생을 기록할 수 없으니 내 몸에 부착된 고통의 계기판을 제거하고 가장 편안한 단추의 상복을 부탁.. 한줄 詩 2015.01.24
내리막에서 그렇다 - 조숙 내리막에서 그렇다 - 조숙 슬픈 길이 있다 그곳에 도착하면 시간은 토막 나고 공간도 머나먼 곳으로 사라져서 부드러운 슬픔이 밀려들어 온다 공업탑 로터리에서 달동 사거리 내리막이 그렇다 울주군청 사거리에서 군부대쪽 내리막이 그렇다 그 길에 멈춰 서던 시간이 멈추는 열차에 올.. 한줄 詩 2015.01.23
가시나무 - 천양희 가시나무 - 천양희 누가 내 속에 가시나무를 심어놓았다 그 위를 말벌이 날아다닌다 몸 어딘가, 쏘인 듯 아프다 생이 벌겋게 부어오른다. 잉잉거린다 이건 지독한 노역이다 나는 놀라서 멈칫거린다 지상에서 생긴 일을 나는 많이 몰랐다 모르다니! 이젠 가시밭길이 끔찍해졌다 이 길, 지.. 한줄 詩 2015.01.22
가족사진 - 이승희 가족사진 - 이승희 지금 여기 있는 게 나라면 지금 여기 없는 나는 누구일까 맨드라미를 키우는 햇살에 부지런히 댓글을 다는 동안 아무도 내 안녕에 댓글을 달지 않았다면 그것이 어둠 속에서 단단해지는 건가? (어둠에 대해 조롱하는 태도는 극히 나쁘다) 중얼거림으로 가득한 이 저녁.. 한줄 詩 2015.01.19
하나뿐인 별에서 - 이상국 하나뿐인 별에서 - 이상국 이 별은 너무 몸이 무겁다 특히 아메리카나 유럽 쪽으로 돌 때면 별은 망가질 듯 삐걱거린다 쓸데없이 가진 게 많아서 그렇다 지구라는 별은 원래 조금 삐뚜름하게 걸려 있는데 한쪽에만 자꾸 짐이 실리면 아주 기울어서 어느 날 중심을 잃고 어둠속으로 떨어지.. 한줄 詩 2015.01.19
밖거리의 밥상 - 김병심 밖거리의 밥상 - 김병심 어머니가 되어봐야 어른이 된다는 말은 믿지 않는다 제주 할망들은 안거리를 자식에게 내주고 밖거리에서 혼자 밥을 먹는다 바람 부는 고망밭에 마늘 심고, 밀감 따는 노역까지 마다 않는다 물질 때가 되면 할망바당에 나가 톳, 몸, 미역까지 죄다 잡아 한질에 널.. 한줄 詩 2015.01.18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 최두석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 최두석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무슨 꽃인들 어떠리 그 꽃이 뿜어내는 빛깔과 향내에 취해 절로 웃음짓거나 저절로 노래하게 된다면 사람들 사이에 나비가 날 때 무슨 나비인들 어떠리 그 나비 춤추고 넘놀며 꿀을 빨 때 가슴에 맺힌 응어리 저절로 풀리게 .. 한줄 詩 2015.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