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밖거리의 밥상 - 김병심

마루안 2015. 1. 18. 22:20



밖거리의 밥상 - 김병심



어머니가 되어봐야 어른이 된다는 말은 믿지 않는다
제주 할망들은 안거리를 자식에게 내주고 밖거리에서 혼자 밥을 먹는다
바람 부는 고망밭에 마늘 심고, 밀감 따는 노역까지 마다 않는다
물질 때가 되면 할망바당에 나가 톳, 몸, 미역까지 죄다 잡아 한질에 널어 말린다
손주는 걸랭이로 업어요, 딸네 깨도 두드려요, 녹두도 장만해요, 오일장 할망장터에 앉아 좌판을 벌인다


제주에서 여자로 태어난 것은 축산이보다 못난 것, 돌밭에서 잔등이 맞고 구부정 허리 될 때까지 돌밭을 엉덩이로 길을 낸다


제주에 와서 살아봐야 안다
삼다(三多)에 남자가 많다는 것
남자보다 더 많은 어머니가
어머니보다 할망이 바다와 밭에 먼저 나앉아 돌이 된다는 것


싱싱한 횟감을 낚아 광질하며 마시는 아들
톳추렴에 넉둥배기로 밤새는 남편


육지 여자들 야반도주에 또 한잔, 자파리의 괸당들
돌아오지 않는 저녁
어제 끓이고 그제 졸이던 밥과 국을 다시
데우며 혼자 먹는 할망이 있다


안거리 내주고 밥도 함께 먹지 않는 할망은
섬의 중심을,
한라산 용암도 씹을 수 있다
제주에선 할망이 되어야 어른이 된다



*시집, <신, 탐라순력도>, 도서출판 각








주역을 펼쳐드니 - 김병심
-선돌에서



선돌에 녹차밭이 처음이었다지
도순까지 퍼지는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야
이모는 세 번이나 살림을 갈라서 미륵을 모신 거야
잠이 오지 않아 신열의 바람 들던 날
선돌 앞으로만 선돌 앞에서만 무릎을 꿇었다지
성이 다른 세 아이 데리고
고독쯤이야, 쓱쓱 제 몸에 칠해 세상을 비웃었던 거야


도순까지 퍼진 녹차향은
아버지를 밤마다 불렀다지
마당에 도화나무 심던 날부터 그리 멀지 않은 얘기지
어머니는 세 번째 살림 얻고 사라진 아버지를 기다리느라
물질을 배웠다지
바닷속에서 둥글게 키운 진주를 쏟고 나서야
배다른 아이를 키울 수 있었다지
돌아온 아버지의 눈 감겨 줄 수 있었다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도 물려받는 가계도
피가 흘러 달 점치며 따라온 이곳
미륵의 손금에 빗금을 친다
눈물에 고여 퍼지는 녹차꽃향기






# 귀에 쏙쏙 들어오는 시집 하나를 발견했다. 제주 출신의 김병심 시인이다. 제주 섬에 나서 평생 섬 밖을 나가지 못한 어느 할망의 연대기를 읽은 느낌이다. 이렇게 가슴 저리는 시를 쓰는 시인이 묻혀 있는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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