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가족사진 - 이승희

마루안 2015. 1. 19. 02:15



가족사진 - 이승희



지금 여기 있는 게 나라면
지금 여기 없는 나는 누구일까


맨드라미를 키우는 햇살에 부지런히 댓글을 다는 동안
아무도 내 안녕에 댓글을 달지 않았다면
그것이 어둠 속에서 단단해지는 건가?
(어둠에 대해 조롱하는 태도는 극히 나쁘다)
중얼거림으로 가득한 이 저녁은 무엇이란 말인지
(측은한 마음에 기대는 태도는 죄악이다)


햇살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느리게 걸어가는 동안 얼굴이 반쯤 지워졌다가 다시 생겨났다 맨드라미가 거짓말처럼 피어 있었고, 멈춰진 시간은 어떻게 결박을 풀고 지금까지 흘렀을까 맨드라미가 얼룩이 되는 동안 익명의 계절이 어떻게 나를 대신하였을까



*시집,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문학동네








핏물 - 이승희



참 예쁘게도 베이셨다. 퇴적층마다 돌칼 무늬 깊숙한 밤들이 도살자의 무심한 표정처럼 속속들이 박혀 있다. 숲이 아닌 도시를 떠돌다 온 사내의 반쯤 사라진 얼굴, 열린 살 틈으로 늙은 매화의 중얼거림처럼 배어나왔다.
밤새 찬물에 몸 담그고 계신 고기는 눈물도 핏물도 버리신 채 오래된 불안처럼 적막하시다.
따뜻한 밥 한 그릇 드리고 싶다. 불안조차 잃어버린 사육의 날들.


당신이 두고 간 적막 앞에는
분노하거나 울지도 못하는 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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