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귀를 씻다 - 조인선

마루안 2015. 1. 27. 08:27



귀를 씻다 - 조인선



좁은 접시에 생선 살 바르듯
이력서 한 칸 한 줄에 적어나가면
고작해야 몇 줄인 생이 새로운 건
그만큼 단순하다는 것이다
몇 년의 행적이 한 줄로 줄어드는 게 덧없는 게 아니라
순간의 모습이 빈칸에 달라붙는 게 간절함이 아니라
생의 전부마저 한 장에 여백을 주더라도
누구에게나 주어진 삶이 결국 비어 있었음에
단절시키고픈 기억들이 아프게 한다
존재가 문자로 남길 어리석게도 나는 바랐다
도장에 인주를 수없이 묻히면서도
거울을 그토록 바라보면서도
도대체 소리는 어디서 오는지 전엔 몰랐네
아무래도 채울 수 없는데 나는 왜 사나
비누질하며 침 뱉으며 숨 가쁘게 수음한 후에 나 고요했었지
애타게 기다리면서 끝내 확인한 후에 나 편히 잠잤네
나 한때 한 방울이 모자라 하도 목말라
나뭇잎 먹는 물고기 그리려다
얼어붙은 화분에 꿈틀거리는 애벌레 보았지만
바람이 이리도 뜨거웠던가
시효 지난 문서처럼 폐기될 내 몸에 누군가 밤새도록 문신을 새겼단 말인가



*시집, 황홀한 숲, 문학과지성








눈을 씻다 - 조인선

 


혀는 마음에도 있다
기억이 꾸불꾸불한 길을 찾아나서면
날름거림은 언제나 오늘이다
늘 같은 곳에서의 식사와
낯선 곳에서의 헤매임이 같았음을 알았을 때
지나는 여인의 눈빛마저도 주전자처럼 권태로워지면
까닭 없이 사는 게 더럽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물고기를 잡으려다 그물 잃어버리고 오던 날부터
어머니는 걱정이셨다
마음이 갈라져 두 눈이 생겼나
어둠을 잔뜩 키워 두 눈이 밝아진다면
묵언정진 수양에 나선 선승의 손끝엔
불립 문자가 새겨지겠지
나 이제 살아도 부끄럼조차 잊은 나이지만
빛을 찾아 헤매던 마음에 어느덧 어둠이 고여 있고
허기와 결핍에 시달리던 내 몸에 상처가 늘었네
더듬어 보니
집게손가락으로 쓱 문질러 백지 위에 이겨진 애벌레는
피 한 방울 없었고
잡풀을 태우려다 말라 죽은 어린 나무는 신음 내지 않았지
손을 씻고 귀를 씻고 나 이제 마음마저 씻으려 하나
눈 감아야 들리는 그대의 미소가
간밤의 꿈에 보여 몸을 떨었네





# 조인선 시인은 1966년 경기 안산 출생으로 중앙대 축산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첫 시집 <사랑살이>를 통해 등단했고 계간 <문학과사회>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알려졌다. 시집으로 <인간이 되기 싫었나 보다>, <사랑이란 아픔으로 남아도>, <별을 좋아하면 별이 된다고>, <황홀한 숲>, <노래> 등이 있다. 현재 안성에서 축산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