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건강한 노인과 고단한 청년 - 정덕재

마루안 2021. 12. 15. 21:50

 

 

건강한 노인과 고단한 청년 - 정덕재

-청년을 우대하는 나라

 

 

새벽에 약수터 물을 떠오고

아침에 게이트볼을 치고

점심에 오첩반상으로 끼니를 때우고

30분 낮잠을 즐기는 게 건강비결이라는

여든일곱 살 장만득 씨는 예순 살에 퇴직하고

칠순까지 아파트 경비원을 지냈다

 

그 이후 17년 동안 돈을 벌지 않았고

중국집 우동 먹을 때 탕수육 하나 추가하는

연금생활자로 살아왔다

규칙적인 생활로 건강을 다진 장만득 씨가

버스를 타고 친구를 만나러 가는데

이십대 중반 청년 하나가 차에 오른 뒤

긴 한숨을 내쉬자

장만득 씨가 벌떡 일어나

청년의 손을 이끌고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 앉혔다

 

등록금 절반은 본인이 벌고

아르바이트로 방값을 내는 스물다섯 살 정민수 씨는

서서 졸거나

의자에 앉아 자는 일이 빈번하다

여자 친구 김순미 씨도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사랑은 통신비로 날아간다

 

건강한 장만득 씨는 도착지까지

자리에 앉지 않아야 하고

건강한 노인은 피곤한 청년에게 자리를 양보합시다

표어는 눈에 잘 띄는 곳에 붙여야 한다

 

 

*시집/ 대통령은 굽은 길에 서라/ 스토리밥

 

 

 

 

 

 

커피 나오셨습니다 - 정덕재

-사물에 대한 존댓말 사용 일부허용

 

 

손님 커피 나오셨어요

과테말라에서 온 원두가

배에 실려 오다 심한 멀미를 하고

항구 도착 후 수입상에 들어가며

자루 째 던져지는 수모를 당했지만

피곤과

학대와

무시와

냉대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젊은 여성이 건네주는 친절한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과테말라에서

태평양을 건너는 배 위에서

부산에서

대전으로 오는 화물차에서도

그 누구 친절하지 않았다

 

손님 커피 나오셨어요

한 마디에

고행 같은 커피의 삶은

잠시나마

고역의 시간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세상에는 존중받아야 할 사물이 많다

 

 

 

 

# 정덕재 시인은 199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비데의 꿈은 분수다>, <새벽안개를 파는 편의점>, <나는 고딩 아빠다>, <간밤에 나는 악인이었는지 모른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