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고독사 - 이문재

마루안 2021. 12. 17. 22:35

 

 

고독사 - 이문재


눈이 오시려나
노인은 굽은 허리에 양손을 대고 한껏 날 선 능선을 바라본다
촘촘한 침엽수들이 잘 발라낸 생선 가시 같다
올려다보는 것이지만 뒤돌아보는 자세
햇살이 기우는 만큼 바람이 한칸 더 습해지고
휴대전화가 터지지 않는 안골에서도 골 끝 꼭대기 집

성긴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아궁이에 솔가지 가득 집어넣었는지 굴뚝 연기가 푸짐하다
안골 안쪽으로 솔가지 타는 냄새가 번져나간다
새끼 노루 쫓는 발걸음처럼 어둠이 잰걸음으로 골 안으로 들어선다
시린 눈 냄새가 타다닥 불 냄새를 와락 껴안는다
눈이 와서 사각사각 쌓이는 산골이 새하얗게 어두워진다

식은 밥 더운물에 말아 백김치 얹어 먹는 밤
대설주의보가 산맥의 동서로 길게 드리워진 밤
툇마루 바로 앞에서 길이 끊기는 밤
전신주가 띄엄띄엄 지워지는 길을 표시하는 밤
부엉이가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는 밤
옹달샘이 얼지 않으려 밤새 퐁퐁 물방울을 솟구치는 밤
은하수가 눈구름 위에 내려앉아 눈구름이 무거워지는 밤

처마 끝 고드름이 추위에 져 일순 숨을 멈추는 밤
노인은 팔순 나이를 윗목으로 개켜놓고
오늘 밤에도 나달나달해진 세계지도를 펼친다
경원선 타고 의정부 철원 지나 금강산 원산 함흥 청진 나진
두만강에서 왼쪽으로 꺾어 길림 장춘 하얼빈 하바롭스크 치타 이르쿠츠크
바이칼에서 한 달포 말을 살찌우다 대초원을 가로질러 천산산맥 천산북로
청년은 말발굽을 새로 갈고 그래 초봄까지 흑해 넘어 코카서스 삼국까지
거기서 아이 두엇 낳고 살다가 천리마 한 마리 챙겨서

그렇지 이스탄불 이스탄불로
늙은 금강송 한 그루 눈을 못 이겨 우지끈 제 가지 하나를 잃는 밤
삼십대로 돌아간 노인은 세계전도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보스포루스해협에서 서양 쪽으로 지는 붉은 해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시집/ 혼자의 넓이/ 창비

 

 

 

 

 

 

꽃말 - 이문재

 

 

나를 잊지 마세요

꽃말이 만든 첫 마음을 생각한다

꽃 속에 말을 넣어 건네는 마음

꽃말은 못 보고 꽃만 보는 마음도 생각한다

나를 잊지 마세요

아예 꽃을 못 보는 마음

마음 안에 꽃이 살지 않아

꽃을 못 보는 그 마음도 생각한다

나를 잊지 마세요

꽃말을 처음 만든 마음을 생각한다

꽃을 전했으되 꽃말은 전해지지 않은

꽃조차 전하지 못한 수많은 마음

마음들 사이에서 시든 꽃도 생각한다

 

 

 

 

# 이문재 시인은 1959년 경기 김포 출생으로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2년 동인지 <시운동>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제국호텔>, <마음의 오지>, <산책시편>,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지금 여기가 맨 앞>, <혼자의 넓이> 등이 있다. 김달진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노작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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