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워 - 이현승

마루안 2021. 12. 10. 22:31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워 - 이현승


극빈이 스케일로 오해되는 순간이 있다.
힘없는 사람들이 권세에 연연하지 않는다거나
가난한 사람들이 황금을 돌 보듯 한다면

우리는 낮은 연봉에는 불만이 없지만
우리에 대한 대우가 그렇다는 사실에 화가 나고
공익성이라는 말의 뜻을 내몫은 얼만가로 이해하는 당신 앞에서
화딱지가 그것도 미역처럼 끝도 없이 올라오지만

극빈이 스케일이 되는 순간이 있다.
곗돈 떼인 박씨가 한바탕 울화를 쏟아내고는
꼭 그 인간이 오죽했으면 그랬겠냐고
그 인간이 그래도 우리집 큰 놈 낳을 적에
미역에 소고기 끊어 왔던 사람이라고 두둔할 때

성자들이 청빈의 접시 위에 말씀으로 영혼을 살찌우듯
없이 살아와서 가지는 것의 짐스러움을 멀리 한다거나
요강이나 재떨이도 영물처럼 여기는 마음일 때가 그럴 때다.
천국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양보해도 좋겠다.

 

 

*시집/ 대답이고 부탁인 말/ 문학동네

 

 

 

 

 

 

少年易老 - 이현승

 

 

눈이 왔다.

이럴 때 삶은

갑자기 나타나서는

난데없이 물건을 맡기고 가는 사람처럼 군다.

 

다짜고짜 내 말 좀 들어보라고 한다.

나중에 알게 되니 일단 들어보라고 한다.

대답할 틈도 주지 않은 채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고는 사라지는 사촌의 발걸음처럼

 

눈이 온다.

총총.

 

피차 바빠 죽겠지만

죽을 만큼 바쁘지는 않아서

안겨주는 물건을 붙들고 서 있는 사람은

그러니까 멍청이 바보 천치지.

 

태어나자마자 고아원에 버려졌고

맞기 싫어서 거리로 뛰쳐나와 살았던 청년이

죽어야 할 이유는 수십 가지인데,

살아야 할 이유를 찾기 어려웠다고

자살을 기도한 이유를 말할 때

 

우리는 또 빨대를 물고 달리듯

숨이 차서 밥통처럼 얼굴이 익는다.

 

바보들은 나이를 잘 먹는다.

그래서 빨리 늙는다.

 

기다리란다고 기다리고서는

도시 연락이 없는 이유를 깨달을 때쯤엔

바보인데, 바보라서 화난 바보가 된다.

 

내일 죽는다고 생각하면

오늘 못할 일이 무엇이랴만

오늘이 마지막날이라는 식으로 덤비다간

매번 마지막을 살게 된다.

 

눈이 온다.

 

청년은 살아남아 노래하는 사람이 되고

청년의 노래는 종소리처럼 울리고

 

첫눈이 진짜 처음 온 눈이 아니듯

죽을 것 같았지만 진짜 죽지는 않는

우리들의 이야기는 매번 거리에서 멈춘다.

 

눈이 온다.

한 일만 년은 올 기세로 온다.

눈을 맞을 때만 소년은 나타나

무언가를 떠맡기고는 종종거리며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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