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겨울밤 - 육근상

마루안 2021. 12. 21. 22:09

 

 

겨울밤 - 육근상

 

 

초저녁만 되어도

불 꺼지는 산중마을입니다

 

산고랑 내려온 바람이

고욤나무 아래 마른 눈 쓸고 가거나

엄니가 켜놓은 얼굴 흔들리거나

처마 끝 매어놓은 빨랫줄 윙윙거리면

도둑괭이 헛간 세워둔 고무래 건드렸나

개들이 컹컹 짖기도 합니다

 

아버지처럼 늙어간 나는

텔레비전 화면이나 멀뚱거리다

밀어둔 양재기 더듬어 호두알 깨물면

마른 손가락 같은 밤이 슬플 때가 있습니다

댓돌 가지런한 신발처럼 쓸쓸할 때가 있습니다

시한이까지만 살기로 한 통나무집 정짓간에서

각시는 마른 북어라도 두드리는지

텅텅 바람벽 울리기도 하는 겨울밤입니다

 

 

*시집/ 여우/ 솔출판사

 

 

 

 

 

 

밥 - 육근상

 

 

산동네 겨울은 낮이 짧아요

점심 먹고 장작 조금 패면 금방 어두워져요

 

대밭에 눈발 해끗해끗 날리기에

자작나무 숯불 끌어모아

곱창김 몇 장 구웠는데 밥이 없네요

각시랑 얼굴만 바라보다 냄비밥 얹어놨어요

 

내가 살아가는 일은

따뜻한 밥 한 그릇 지어내는 일이라서

목청 높이기도 해요

저녁 지으려 분주히 날아다니는 새 떼 좀 보세요

쟤들도 따뜻한 밥 한 그릇 지어내려

일필휘지 휘두르고 있네요

 

밥 타는 냄새가 나는데 조금 더 두기로 했어요

장꽝 쌓이는 눈발이 너울너울 즐거운 날에는

맨으로 뜯어 먹는 누룽지 맛도 괜찮더라고요

고구마도 몇 개 묻어두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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