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무늬 흉터 - 박지웅

마루안 2021. 12. 16. 22:03

 

 

꽃무늬 흉터 - 박지웅


서랍 안쪽에는 세상이 모르는 마을이 있다
속으로 밀어넣은 독백들이 저희끼리 모여 사는 오지

먼 쪽으로 가라앉은 적막에 새들도 얼씬하지 않는
바람마저 알아차리지 못한
그 외진 길에 편지 하나쯤 흘러들었을 것이다

서랍에 손을 넣으면
독백은 내 손을 잡고 아랫마을로 내려간다
그렇다고 나는 믿는다, 종종 과일이 사라지는 것은 마을에서 손이 올라온 것

내가 먹은 그리움에는
왜 뼈가 나올까

누군가 파먹은 사람의 안쪽
가만히 문지르면 흉터는 열린다, 서랍처럼

가끔 그곳에서 곡소리가 난다
고백 하나가 숨을 거둔 것이다

부치지 못한 편지 밖으로 발을 내민 그리움
뼈만 남은 글자들이 꽃상여에 실려 거처를 떠난다, 그렇다고 나는 믿는다

모든 흉터는 눈뜨고 죽은 글자들
모든 꽃은 죽어서 눈뜬 글자들이다

 

 

*시집/ 나비가면/ 문학동네

 

 

 

 

 

 

신(神)이 하나 깨졌다 - 박지웅

 

 

저 집의 생계비는 대부분 슬픔이 댔을 것이다

 

비명 같은 것이 눌러앉은 기괴한 폐가

집은 멀찍이 멀어져 집의 외지가 되었다

 

저걸 한 채라고 부를 수 있나

지방 도로에 해진 신발짝처럼 떨어져 있으니 겨우내 지나는 눈발마다 발목을 넣어볼 것이다

헐벗은 신을 더 외진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

 

무너진 지붕 아래 폭삭 꺼져 있는 한해살이풀들

풀의 가정에서 떨어져나온 부수(部首)들, 부스러져 속뜻을 헤아릴 수 없으니 무성한 뒷말뿐

한때 쓸쓸함도 다 남의 일이 되리라

 

겨울 잡목숲에 해독할 수 없는 쐐기문자들

수만 근 점토판을 비스듬히 들고 산등성이에 앉은 십이월

 

집이란 집일 수밖에 없는 핏줄들이 한데 모인 주머니

 

지푸라기 하나에서 나뭇잎과 발자국과 낮달과 눈동자, 당신 귓속에 이른 물결소리 하나까지 제 영혼을 꾸려 먼발치로 돌아가고 있다

 

빈집은 신이 하나 깨어진 것

지상에 가장 가까웠던 신의 육신이 희미해지고 있다

 

 

 

 

# 박지웅 시인은 1969년 부산 출생으로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4년 <시와사상> 신인상, 2005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너의 반은 꽃이다>, <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 <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 <나비가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