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겨울날의 모든 저녁은 슬프다 - 우대식

마루안 2021. 12. 15. 22:04

 

 

겨울날의 모든 저녁은 슬프다 - 우대식
 

 

지옥을 유예하는 꿈을 꾸었다

원한다면 다음 생애를 이어가며

지옥을 영원히 유예할 수 있다는 꿈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영원 너머 한 번은 그곳에 가야 한다는

괴로움에 몸을 떨었다

지상의 소시민이

이렇듯 큰 생각을 하며

지옥 아래 마을을 떠돈다는 사실이

조금은 쓸쓸했다

추운 겨울 저녁

들기름 바른 김을

숯불에 굽던

옛집으로 돌아가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눕고 싶다

오한 속에서 만나는

지옥의 야차(夜叉)와 일대의 싸움을 끝내고

오랜 잠을 자고 싶다

겨울날의 모든 저녁은 슬프다

봉당에 켜진 알전구처럼

겨울날의 모든 저녁이 나를 기다렸다

 

 

*시집/ 베두인의 물방울/ 여우난골

 

 

 

 

 

 

허무의 주루(酒樓) - 우대식


봉황성
주루 난간에 자리를 잡고 한여름을 보낸다
휘황한 밤의 색(色)
연암이 살았더라면
술과 참외를 시키고
속된 말로 어진 말로 한참을 기웃거렸을 것이다
먼 곳으로부터 흘러오는 강물은 하염없고
수제 팔찌를 파는 늘씬한 젊은 여자의 눈은 반짝인다
바닥에 흥건한 물을 디디면
지나간 것과 여기 있는 것들이 서로 부딪힌다
맥주를 한 모금 입에 물고 오랫동안 굴려본다
허무의 빛깔이 이토록 화려하다는 것
어떤 목적도 없이 살아왔다는 부끄러움을 그대로
안고 가련다
이방의 주루 난간에서
양꼬치 한 접시와 맥주 세 병을 앞에 놓고
한 인생의 머지않은 미래와
뭇사람들이 남겨놓은 화려한 문양과 그때도 흘렀을
강물을 생각해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