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위험한 의식 - 김윤환

위험한 의식 - 김윤환 태초에 세족식은 없었다 사람이 만든 거룩함이란 발바닥에 찍힌 생애의 지도가 흐물흐물 풀어지는 쓸쓸한 주문(呪文) 같은 것 확인되지 않는 청결의 율법 발보다 깨끗한 손이 아니라면 타인의 발을 씻는 일은 언제나 절벽의 의식 노아의 홍수 이래 무균의 샘은 없었다 정화수에 비친 제사장의 얼굴 그 눈에 티끌은 어찌하랴 새벽을 창조한 신이 사람의 발을 씻는 날 한번만 허용되는 그 위험한 의식에서 나는 내 발에 묻은 지도를 아프게 아프게 떼고 있었네 발을 씻는다는 것은 껍질을 벗겨낸다는 것 발등에 떨어진 하늘을 건진다는 것 발목을 떼어 하늘로 보낸다는 것 *시집/ 내가 누군가를 지우는 동안/ 모악 주일서정(主日抒情) - 김윤환 저기 휘청이며 오는 교인들의 날숨소리를 주워 담는 예배당 계단 날마..

한줄 詩 2021.11.22

일도 열심히 하고 엄청 착했다 - 박지웅

일도 열심히 하고 엄청 착했다 - 박지웅 척은 이웃집에 살지만 이웃인 척은 안 했어요 친절과 파괴의 어원은 같아요 요즘은 이웃으로 살지요 척이 방문을 열면 입을 벌리고 나는 빙그르 돌아요 나더러 악어 같대요, 물론 아니죠 침대가 내 구역일 뿐이죠 여기에서는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거든요 밤은 내 밥벌이예요, 나는 여권도 없는 스트립 걸 홀딱 벗고 들어갈까요? 사랑이라는 세계 나는 잘 몰라 먼 데를 바라보는 사람은 착하거나 외로워요 인간은 모두 굶주림에서 출발했어요 내가 반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그가 데리고 온 거짓말 고마워요, 사랑해요 그 말을 들었으니 내 귀는 충분히 잘 살았어요 가을이 등을 돌릴 때 첫눈은 내려요 생년월일이 없는 몸통을 우리는 눈사람이라고 불러요 나는 밤마다 눈사람이 되는 거죠..

한줄 詩 2021.11.21

입술의 향기 - 이시백

입술의 향기 - 이시백 살다 보면 이사를 다닌다. 이유야 저마다 다르지만 우리는 터전을 간혹 바꾼다. 서식지를 안전하게 두려는 동물적 감각 살다 보면 다투고, 서운하고 아쉬움이 남는 흔적이 사는 곳마다 있다. 떠돌며 가장 섭섭한 건 추억의 공간이 사라지는 것 또한 포기해야만 하는 미련도 얼마나 많은가 세상이란 떠나는 길을 늘 염두에 둬야 한다 사는 동안 지상의 가치는 뭘까? 생을 다하는 날까지 고운 말을 해야 한다. 전달하는 말에서 꽃향기가 나야 한다. 이것이 살아있는 날에 최고의 미덕이다. *시집/ 널 위한 문장/ 작가교실 상호보완 - 이시백 물이 흐르는 곳을 바라본다. 수천 년 흘렀어도 지금도 흐르는 강물 나는 멀리서 가마우지의 적시는 발로 대신한다. 예전부터 발을 담그고 생활의 터전으로 살았을 가마..

한줄 詩 2021.11.21

보헤미안 랩소디 - 최서림

보헤미안 랩소디 - 최서림 개미동굴만한 지하방에 세 들어 산다. 가을빛이 피곤하고 우울해 지네처럼 숨어 지낸다. 보헤미안 랩소디처럼 흩날리는 노란 은행잎도 그의 시들어가는 감각을 깨우지 못한다. 안으로 걸어 잠근 마음 문을 두드리지 못한다. 세상이 저만치 따로 굴러간다. 흔들리지 않는 바위도 못되고 세상을 향해 날아가는 짱돌도 되지 못하고 밟히면 부스러지고 마는 부스럭돌이 되고 말았다. 담배냄새 짙게 밴 이불 속에서 모가지만 빼들고 있다. 깡그리 싸질러버리고 싶은 분노도 삭아져버렸다. 창 한 번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모비딕 아가리 같은 세상 속으로 삼켜지고 있다. *시집/ 가벼워진다는 것/ 현대시학사 빗장 - 최서림 과일 하나도 유기농만 가려서 먹는 그들은 스펀지처럼 보드랍고 상냥하다. 도우미도 강아지도 ..

한줄 詩 2021.11.20

외로운 사람은 외롭게 하는 사람이다 - 이현승

외로운 사람은 외롭게 하는 사람이다 - 이현승 마치 백년 전에도 태극기를 흔들었던 것처럼 오늘의 거리에는 노인들이 많다. 개항과 자주가 붙었다 떨어졌다 했던 백 년 전처럼 태극기 옆에는 유대의 깃발들이 보이고 박근혜 석방, 문재인 OUT을 앞뒤로 새긴 피켓을 향해 박근혜 X X X ! 인도 쪽에서 누가 쏘아붙이자 노인의 눈에서 다시 화염이 일었다. 백두산은 휴화산이 아니라 활화산이었다. 천년 전에 한반도를 1미터 두께로 뒤덮었던 화산재조차 어떤 풍요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죽은 풍뎅이를 잘라 나르는 개미떼를 보듯 자연의 편에선 다 합리화가 가능하고 잘못된 선택과 행동조차 교훈을 남긴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허기보다 착찹한 진실로 남는다. 지난 백 년 동안 제국주의에 맞서고 민주주의를 위해서 싸웠지만 싸우..

한줄 詩 2021.11.20

밥심 - 강미화

밥심 - 강미화 어금니 채워진 사람은 밥힘이라고 하고 앞니 빠진 사람은 밥심이라고 하던데 이 빼고 틀니로 바꿀 때가 되다 보니 밥심이 맞지 싶다 밥알 하나에 팔십 번 손이 가야 한다는 옛말이 말뿐이것냐 논두렁 밭두렁 걸어보지 못한 부지깽이도 모든 일엔 정성을 드려야 한다는 뜻 아닌가 싶다 미안하다 빵을 더 먹였지 싶다 잘못은 나만 할 테니 밥힘으로 살어라 달리 보약이냐 심덕 곱게 써서 살다 보면 약이 되는 거여 *시집/ 오늘 또 버려야 할 것들/ 문학의전당 지팡이 - 강미화 숟가락 무거운 것도 싫고 더 나이 들면 무얼 가지고 살까 싶다 명아주 말이다 젊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솟구치다, 흔들리다 뭐라도 피워볼까 대 세우다 도로 아미타불 된 거 아닌지 가슴팍을 찌고 말리고 찌고 말리고 수십 번 당하고 사신..

한줄 詩 2021.11.18

여수 바윗골 - 육근상

여수 바윗골 - 육근상 자귀나무 꽃이 도깨비불처럼 창호에 흔들리고 있는 것이어서 나는 마당으로 나와 헛간을 변소를 텃밭을 둘러보다 장꽝 옆으로 난 조붓한 대밭 길 따라 강 마을까지 왔다 지금은 깊은 밤이라서 개 짖는 소리보다 먼 데서 넘어왔을 빗소리 더욱 깊게 드러나 매어놓은 쪽배 곁에 물빛으로 출렁거리고 있는데 강 건너 여수 바윗골 징 소리 가뭇하게 들린다 누이는 차가운 마룻바닥에서 고깔 쓴 노파가 시키는 대로 삼배하고 있을 것이다 내세를 생각하다 북받치는 듯 흐느끼고 있을 것이다 나는 여수 바윗골 다녀온 날이면 온몸 힘 빠지고 불덩이 삼킨 듯 목 타올라 엄니 모시는 일에서 비켜나 뱃전 맴돌고 있다 어느 한 곳 온전히 정착하지 못하고 밖으로만 떠도는 내 쓸쓸함이나 외로움은 출렁거리는 물결 소리로 자란 ..

한줄 詩 2021.11.18

예약된 마지막 환자 - 이윤설

예약된 마지막 환자 - 이윤설 나의 병은 주치의의 주특기, 삼십 년째 이 원인 모를 난치병을 연구했고 당연히 국내 유일한 권위자로 성장했다 그에게 나는 오늘 혼이 났다 먹어서는 안 될 사슴뿔 고아 짠 용을 남몰래 복용했기에 그의 예단대로 통증은 격심했고 불면은 깨진 유리처럼 저항력을 손상시켰다 두 손을 모아쥐고 머리를 조아리며 의사의 말을 따르지 않는 환자는 치료할 수 없다는 극단의 처방을 거두시기를 앙망하느라 내 눈자위가 떨잠처럼 으달달 떨렸다 차트를 갈겨쓰는 창백한 흰 가운의 그는 환자를 정면으로 쳐다보는 법이 없다 나는 소독된 햇빛이 비치는 책상 위 모형 범선을 보고 있었다 펜을 멈추지 않은 채 그는 말했다 제 의료 인생은 선원들과 함께한 험난한 항해와도 같았죠 닻을 내리기 전까지 무엇보다 선원들과..

한줄 詩 2021.11.17

가당찮은 일들 - 김한규

가당찮은 일들 - 김한규 웃어서 복이 온다면 누가 가로채는가 하루 종일 서 있는 웃음을 커피 자판기에서 컵도 안 나오고 물만 흐르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인가 어디에 대고 물어볼 것이 없는 생이 흘러들어 가는 하수구에서 생쥐가 올라오고 발목이 물린다 악착같이 습지에서 바르작거리는 월세의 빚진 꿈이여 일 년 거치로 잠시 죽음을 미뤄 놓고 나간 아침에 비가 내린다 아무것도 건질 것이 없는 구덩이가 놓인다 걷지 못한 빨래 뒤에서 문 뒤에서 벽 뒤에서 끊어진 가스 호스 아래서 무거운 이불 속에서 썩고 있는 시체를 모르는 채 넘어가는 하루를 웃으면서 셀 수 있는가 우리라고 부르며 묵살당한 얼굴로 뜯겨진 이름에 걸려 엎어지는 인간이라는 이상한 상태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일어나는 것이지 매를 맞는 기분으로 웃음을 유발..

한줄 詩 2021.11.17

묘비명에 대한 답신 - 우대식

묘비명에 대한 답신 - 우대식 칸트의 길을 걷는다 오후 3시 30분 정확한 시간에 느릅나무 아래를 지나 문이 닫힌 카페 앞 노천에서 담배를 피워 문다 아직 지팡이를 쥘 나이는 아니다 바쁜 사람들이 지나가지만 나는 그들을 보고 있지 않다 생각과 싸우는 사람 지금까지 모든 생각을 불태울 수 없을까 신의 증명이라는 정거장 앞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아닌 척했지만 늘 사소한 불안함에 모든 것을 망치곤 하였다 칸트의 묘비명은 맑고도 슬프다 그가 경이롭게 생각했던 것은 별과 도덕 법칙이었겠지만 나를 채찍질한 것은 그 앞의 전제일 뿐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떤 고독 같은 것으로 인해 설명할 수 없는 괴로움과 달콤함에 취해 살아왔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무언가 어긋났다는 내용의 편지를 쓸 수밖에 없다 칸트에게 저녁밥은..

한줄 詩 2021.11.17